덕자득야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이 글에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읽는 것을 권합니다.
유치하며 해로울 뿐만 아니라 멍청하기까지 한 말이 있다. 바로 '인생 선배'라는 말. 모두가 똑같이 한 번 살고 죽는 인생인데 고작 며칠 먼저 살았다고 잘난 체 한단 말인가. '내가 살아보아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말은 제 자식을 망칠뿐더러 남의 자식도 망치는 말이다. 설사 나이가 적어도 더 잘 아는 것이 더 많을 때가 있다. 종이에 손가락을 베어도 베일 때마다 아픈 게 인생이다. 얼마 더 살았다고 고통에, 슬픔에, 상실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베일 때마다 아프더라. 아니 처음 베일 때보다 그다음이 더 아프더라. 살아도 살아도 인생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인생의 절실한 문제, 살아도 살아도 막막한 삶의 난제를 다룬다. 이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천마행공天馬行空, '빼어난 말[天馬]이 하늘을 달리다'는 식으로 무한한 변화와 자유를 뜻한다고 풀이할 수도 있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장자>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고대 중국인은 인생이란 작은 틈새로 재빨리 말이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한 순간이라 말한다.
"다른 이들과 서로 부대끼고 치이며 살아가면 날랜 말이 달리듯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는데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 그렇게 수명을 다하면 애닯지 않겠어? 죽을 때까지 힘써 일하더라도 뭔가 이루어 냈다며 내세울 것이 없고, 고달프고 힘들지만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슬프지 않아? 죽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렇더라도 무슨 이로운 게 있을까. 몸이 늙어가면 마음도 똑같이 늙어가는 걸. 이게 가장 슬픈 일이지. 사람의 삶이란 정말 이처럼 어리석은 걸까? 나만 홀로 어리석을 뿐, 어리석지 않은 사람도 있는 걸까?" - <장자 제물론>
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 - 《莊子 - 齊物論》
영화는 멀티버스를 소재로 전개된다. 한 사람의 중요한 선택마다 또 다른 우주가 만들어진다는 것. 즉 이 우주 어딘가에 다른 삶을 사는 내가 있다는 거다. 다른 선택을 한 나. 그렇게 우주는 무한하며 나는 다양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만약 이 우주와 저 우주를 가로지를 수 있다면 어떨까? 여기서 저기로 '점프'할 수 있다면. 배우가 된 내가 있으며, 요리사가 된 나도 있다. 가수, 무림고수, 과학자, 메이드 등등. 점프, 즉 도약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삶에 접속할 수 있다.
현대철학의 세례를 받은 이런 주제는 이제 낯선 게 아니다. 내가 아닌 나, 나와는 다른 나, 나를 조종하는 나와 같은 주제는 이미 다양한 영화에서 다루었다. 영화는 옛 홍콩영화를 떠올리는 장면들을 버무려 이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그렇게 에브리씽, 만사만물萬事萬物이 유쾌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에 열려있다니 얼마나 즐거운가. 영화는 가장 실패한 삶이니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잠언 역시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한들 그것이 늘 충만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가능성이 많아질수록 이 삶은 초라해진다. 더 나은 선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겹겹이 쌓여 막막한 허무로 우리를 던져 넣는다. 이 영화가 단순히 즐겁고 유쾌함에 그치지 않는 것은 이 허무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인생이 아무리 많은 가능성에 열려있다 한들, 냉소와 허무는 사라지지 않는다. 자유로울수록 허무에 한 걸음 가까이 갈 수밖에 없다는 역설.
흑색 고리, 혼돈, 허무 ... 조부 투바키가 만든 베이글(!)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하긴 허무만큼 강력한 게 어디 있을까. 어쩌면 슬픔의 본질은 허무가 아닐까? 무수히 많은 삶을 살 수 있다면 가슴속의 헛헛함은 사라질까? 현재의 무의미함은 달리 선택한 또 다른 우주를 만나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허무함에 바스러지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설사 돌이 된다 하여도 이 먹먹함이 씻어질까.
하여 이 영화의 미덕은 허무라는 난제를 다룬다는 거다. 에브리웨어, 임하지방任何地方 어느 곳이든 허무가 함께 한다. 그러니 차라리 나를 허무에 내던지는 게 낫지 않을까. 이 영화의 악역(?) 조부 투바키의 본심을 만날 때 울어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허무와 냉소가 밀려와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은 스크린 속의 설정에 그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참을 수 없는 허무함은 차례차례 나의 우주를 파괴할 테니 말이다. 그만큼 허무는 힘이 세다. 울어버릴 수밖에 없는 건 나 역시 그렇게 허무에 먹혀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가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로 순진하게 긍정의 힘을 강조했다면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을 테다. 영화는 지혜롭게도 다른 길을 선택한다. 다중우주 사이를 도약하여 다양한 능력을 발현할 수 있다면 모든 능력을 한 번에 발휘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마블식의 표현을 빌려 '우주적 존재'가 된다면. 주인공을 초인(Übermensch)으로 만들어 모든 자잘한 문제를 돌파해버리면 어떨까?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Neo처럼. 예를 들어 다중우주를 다루는 영화 <더 원>에서는 다중우주의 다양한 인격을 흡수하여 One, 온전히 하나가 된 장면을 그려낸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통과한들, 무수히 많은 삶을 살아낸들 삶은 더 완전해지지 않는다. 각각의 삶에는 또 저마다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다중우주를 꿰뚫는 '온전한 나'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나' 따위 대신 영화는 '조금 다른 나'를 제시할 뿐이다. '제3의 눈'을 다루는 방식이 그렇다. 제3의 눈은 보통 진리를 보는 눈으로 이야기되나 영화는 그런 진지함을 내 던진다. 제3의 눈은 그냥 장난감 눈을 가져다 붙인 데 불과하다. 그렇다고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조금 다르게 상대를 보는 눈이다. 그렇게 영화는 '다정함'을 찾아낸다.
무수한 다중우주를 교차하며, 다른 삶을 경험하여 도착한 것이 '다정함'이다. 살아낼수록 삶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삶에는 저마다의 고통과 외로움이 있다. 하여 더 많은 삶을 살아낸 사람이 가져야 할 미덕은 다정함이다. 너도 나처럼 괴롭겠지. 결국 영화를 보면서 내 슬픔이며 외로움이며 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나 역시 한 줌의 다정함을 바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을 수 없는 허무를 견뎌내는 것은 결국 소박한 진실과 한 줌의 다정함이었다는 것을.
영화가 묘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해체된 주체가 당면한 지점을 잘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내 것 같지 않다. 내가 걷고 있는 시간이 낯설고, 창밖의 공기가 어색하다. 머리는 뒤죽박죽, 어제가 천년 같고 아침이 어제 같다. 그렇게 깨어진 세계를 살고 있다. 나만 홀로 멍한 걸까[其我獨芒]? 아니, 멍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而人亦有不芒者乎] 내가 나를 낯설게 살아가듯, 다른 우주의 나 역시 스스로를 어색하게 여기고 있을 테다. 죽을 때까지 나는 나와 친하기 힘들겠지.
결국 잠깐의 상식을 붙잡고 한 줌의 다정함을 기대할 뿐이다. 그렇게 올 앳 원스, 일순지간一瞬之間 그작그작 닥치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하여 영화는 다중우주라는 소재를 빌려 일상을 말한다. 그것을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식으로 뻔하게 말하지는 말자. 저마다 힘겹게 살아내야 하는 삶이니 말이다. 다만 나에게도 타자에게도 다정한 삶은 조금 다른 삶을 선물해줄 수 있다. 각각의 가능성에 평안을. 다정함은 허무의 공백을 메우는 힘을 가졌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의 삶이란 작은 틈새로 말이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단다. 모든 것이(萬事萬物, Everything) 어디서든(任何地方, Everywhere) 한 순간에(一瞬之間, All at Once) 지나간단다. 손가락 틈으로도 인생의 한 순간을 다 볼 수도 있을 테다. 그 틈에서 누구는 허무를 읽고 슬픔을 먹고 누구는 허무를 읽고도 다정함으로 맞설 테다. 천마행공天馬行空, 그렇게 지나치는 삶의 지독한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다정함은 힘이 있다. 새끼손가락으로 전해지는 살가운 정이 있지 않나. 작고 소박한 것이 힘이 있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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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 그러니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라도 다정하게 받아주자. "네 손가락을 먹고 싶어." 영화가 다루는 퀴어퀴어함은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