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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Oct 27. 2022

이렇게 된 이상 천안문으로 간다

<짱개주의의 탄생> 7-8장 발제

예로부터 조선 반도에는 훌륭한 창작자가 많았다. 그 가운데 21세기를 뒤흔든 인물로 이말년을 꼽아야 한다. 그로 인해 '병맛'은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맥락 없는 전개, 과도한 설정, 괴상한 대사들은 말 그대로 '시공간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여러 명작들이 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수많은 밈을 낳았다. 거기에는 어떤 광기가 있다. 불타는 버스로 청와대로 간다는 설정 자체가 갖는 우스꽝스러움, '오케이'라는 대답을 내지르는 기사의 결연함. 부아앙 울리는 배경음이 낳는 긴장감. 적어도 이 작품은 청와대로 상징되는 공간이 결코 성역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청와대로 가서 뭐하게? 몰라. 일단 가서 생각하자. 물론 만화는 청와대에 도달하지 못하고 끝난다.


혹자는 여기서 권위주의가 무너졌음을 읽어낼 것이다. 혹은 정치적 공간으로 표상되었던 청와대가 희화화되고 있는 상황을 읽어낼 수도 있다. 한편 '비겁한 변명입니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을 이런 식으로 비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이쪽저쪽에서 빼먹기 좋은 소재가 되었다. 세기말적 미학이기도 하고, 탈정치화된 미학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다. 불타는 버스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촛불 시민의 것도 아니고 태극기 집회의 것도 아니다.


<짱개주의의 탄생>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쓸데없이 이말년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은 과연 '이렇게 된 이상 천안문으로 간다'식의 밈이 중국에 어느 시절에 등장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탄 버스가 천안문으로 '진격'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해체되어버린 병맛 - 이맛도 저 맛도 아닌 깔끔한 병맛 드립이 도래할 날이 언제인가 질문해 보는 것이다.


책의 중반 7, 8장에 이르러 저자가 꽤 흥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네가 알고 있는 게 아니거든 흥흥! 하는 식으로. 앞부분에서도 그랬지만 전선은 넓어졌고 저자가 다루는 문제는 매우 다양하다. 혐중을 생산하는 안보 보수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데는 유효한 의미가 있겠다. 그러나 저자의 논의가 혐중嫌中을 너머 지중知中을 지향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쉬이 답을 찾기 힘들다. 저자는 혐중, 그러니까 친미주의적 시각, 신식민주의적 태도를 꼬집고 있지만 과연 어떻게 중국을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꼼꼼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너네가 보는 게 틀렸다는 이야기는 많이 말하는데,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는 말씀.


'7부 자본의 문제를 중국의 문제로'는 단순하다. 자본 '내부의 문제를 외부화하려고 중국을 동원한다'(253쪽)는 지적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자본주의의 외부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서구와 순결한 중국이 있다는 식은 위험하지 않는가? 앞서 보았던 <민간중국>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중국의 일부는 이미 세계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 따라서 어떤 문제, 자본주의의 모순의 생생한 광경이 중국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본의 문제와 중국의 문제가 따로 있다 말할 수 있을까? 


'8부 신냉전체제의 구축'은 여러모로 아쉽다. 신냉전체제야 말로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저자의 혜안을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홍콩 문제나 대만 문제를 보다 깊이 다뤄주기를 기대했건만 이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볼 수 없었다. 세계 패권국가로서의 미국의 전횡, 이에 맞서는 중국의 대응이라는 식의 구도가 반복되고 있다. 미국이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중국이 저러지 않았을 텐데 운운. 저자의 가정 역시 하나의 가정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너네가 중국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라는 식의 구도에서 서술하고 있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다. 한국의 대중들은 중국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꾸로 어떤 상황에서는 이해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중국과 한국이 꽤 가까운 까닭이다. 저자는 중국이 미국의 군사력을 이 세기 내에 넘어서기 힘들다고 말한다. 중국의 군사 능력을 너무 확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엉뚱한 질문. 그렇다면 이번 세기, 21세기에 이말년식의 탈정치화된 밈이 등장할 수 있을까? 중국의 권위주의적 통치체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한국인들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문제다.


이른바 '짱깨판별법'에 천안문이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대중들은 중국을 마음껏 혐오하면서도 중국의 아픈 부분을 나름 찾아내는데 열심이다. 혐오는 게으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부는 예민함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중국의 팽창주의에 대한 두려움, 공포, 비판 등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일까? 세계적으로 유래 없이 높은 혐중 정서를 가진 한반도인들의 특징은 무지의 결과라기보다는 민감함의 결과라고 보아야하기도 하다.


따라서 혐중은 식민성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기도 하다. 동족 의식이 낳은 혜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안 보아도 알거든. 오늘 중국과 가장 유사한 권위주의 국가를 경험했거든. 중국의 인민들이 70-8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타당하다. 요컨대 중국 혐오는 친미주의적 신민성의 산물로만 보기에는 좀 복잡하다는 이야기.


양안문제, 대만과 중국의 문제는 현재적-미래적 문제니 차치하자. 홍콩 문제는 개인적으로 꽤 당혹스러웠다. 나는 홍콩 인민의 불만 혹은 불안이 '민주주의'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홍콩은 20세기 내내 아시아 속의 유럽이었다. 그곳이 영국 식민지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들, 홍콩은 탈아입구의 전진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홍콩간다'는 말은 서구적 뽕을 맞은 쾌락을 설명하는 수사였다. 서세동점 이후 동아시아인들이 품은 동경을 해소하는 공간이었다 하면 너무 과장일까?


그러나 개혁개방과 홍콩반환 이후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민간중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홍콩 반환에 앞서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 선전深圳을 중심으로 홍콩을 쪽쪽 빨아댔다. 오늘날 홍콩은 쭉정이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내가 보는 관점에서, 홍콩 인민의 불안과 불만은 20세기 과거에 대한 추억, 21세기 중국에게 빨려버린 혹은 털려버린 소외감, 중국 내 2등 시민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여기에 저자의 논의를 빌리면 식민성이 낳은 귀소본능 등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여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홍콩을 비판적으로 보더라도 그들의 '민주화' 호소를 마냥 신식민주의의 산물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홍콩의 미래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포장 아래 감춰진 낯설고 거친 미래가 강요되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중국'을 외치는 권위주의적 국가 체제는 홍콩 인민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해줄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그들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를 줄까? 아니, 그렇지 않을 테다. 홍콩 상황을 세세히 알 수 없지만 꼼꼼하게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호소에 동감하지 못하면서도 그들이 호소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곤혹스러움은 양안문제, 중국과 대륙 사이에서도 벌어질 테다. '하나의 중국'이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달성해야 할 지상과제인가? 적어도 홍콩과 비교해보면 대만 문제는 크게 다르다. 홍콩은 서세동점의 상징적 공간이었다면, 거꾸로 대만은 중화민족주의의 팽창에 상처를 입은 곳이다. 오히려 중국 역사 내내 대만은 오래도록 변방이었던 곳 아닌가. 국민당의 침탈, 이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침탈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 누구의 편을 들것인가?! 복잡한 문제이다.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중화체제 안에 다양한 주체 가운데 하나로 대만인들을 포용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의심이 많다. 저들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표어가 '너도 나도 사이좋게'식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혐중을 경계하면서도 '이렇게 된 이상 천안문으로 간다'는 식의 밈이 아무렇지도 않게 유통되는 미래를 바란다. 문득, 둘 가운데 무엇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 의문이다. 이 땅에 중국에 대한 혐오가 그치는 날이 먼저 올까. 아니면 중국에 탈정치적 밈이 광광 울리는 날이 먼저 올까. 나는 후자에 대한 기대가 적다. 결국 나도 조선인인 바, 이 땅의 인민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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