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한자능력검정시험을 보지 않나요?" 아빠가 한문을 공부하는 사람이고 아이가 초등학생이다 보니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물론 한참 전에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치르게 한 적이 있기는 해요. 7급인가 8급 시험인가. 한번 시험을 경험하고는 시험을 치르게 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한자능력검정시험 자체가 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몇 년 전부터 S대 대학원 한문 시험 과외를 하고 있습니다. S대 대학원에 가려면 제2외국어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한문도 시험 과목에 들어있습니다. 국문학, 사학, 철학, 국악 등 전공자들은 한문 시험을 치르곤 해요. 상담을 하면 가끔 이런 사람을 만납니다. '한자 1급인데 한 달 정도 준비하면 될까요?' 저런 질문을 받으면 속으로 한숨이 푹 쉬어집니다. 제 경험을 미루어보면 한자 급수 시험은 한문 시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까닭입니다. 아니, 도리어 방해가 됩니다.
그래도 글자를 아니 괜찮지 않으냐 반문하기도 할 텝니다. 그러나 글자만 기계적으로 외는 것이 글을 읽는 것과 무슨 상관일까요? 영어 단어장을 줄줄이 왼다 하더라도 글을 읽고 풀이를 하는 데는 다른 공부가 필요합니다. 문법도 알아야 하고, 나름의 배경지식도 필요합니다. 영어단어 외는 것은 그나마 좀 낫습니다. 한자능력검정시험의 경우 그저 한자의 '음', 그러니까 한자 독음을 읽는 능력을 측정하는데 그칩니다.
예를 들어 한자를 배운 아이들은 '足', 이 글자를 보고는 대번 '발 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충분하다'는 뜻이 있는 줄은 몰라요. 물론 '만족滿足', '부족不足'과 같은 단어를 보면 그런 뜻을 짐작할 수 있지만 태반은 그저 발이라는 뜻으로만 이해합니다. 아이들만 이렇지 않아요. 한자를 제법 안다는 사람도 비슷합니다. 이러니 '足以觀矣' 이 문장을 보고, '발로 본다'는 식으로 풀이하곤 합니다. '볼만 하다'는 뜻을 떠올리는데 한참 시간이 걸립니다.
한문을 가르치면서 한자를 많이 안다는 사람일수록 글을 못 읽는 현상을 보고 이건 새로운 종류의 문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자는 읽는데 글을 읽지 못하는. 낱글자는 잘 알지만 글을 못 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합니다. 하긴, 솔직히 저도 한문을 늘 가까이하는 입장이지만 한자능력검정시험은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경서經書나 사서史書류 문장을 읽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는데 단어를 물어보면 모르는 것 투성입니다. 어려운 단어를 한자로 써보라면 못써요. 읽으라고 해도 잘 읽지 못합니다. 그래도 별 어려움 없이 잘 공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철학 전공자인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한문을 목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사라진 문자,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문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문자는 사유의 도구이며, 문장은 소통의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수 천 수 만 한자를 외고, 낯선 개념어를 줄줄 늘어놓아도 머리가 텅 비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전자 사전이 손안에 있고, AI가 번역을 하는 시대에 글자를 외고 읽는 능력이 무슨 쓸모인지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한편 한자 공부에 학을 뗀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글자를 익히는 데는 왕도가 없어요. 귀찮지만 반복해서 쓰는 수밖에 없어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써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빽빽이(깜지)라고 있었어요. 종이에 새까맣게 계속 써서 익히는 것입니다. 손가락이 부러져라 쓰다 보면 어떤 글자든 익힐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매우 수고롭기도 할뿐더러, 일상에서 한자를 볼 기회가 없는 오늘날에는 몇 배의 수고를 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한자 공부는 늘 재미없고 힘들고 귀찮습니다. '한자 공부 = 지겹다'는 등식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유튜브 영상이 있습니다. 중국인에게 한자를 써보라고 하는 영상입니다. 중국인이야 한자를 매일 쓰니 글자를 쓰지 못하는 일이 있겠나 싶지만 웬걸요. 그들도 어떤 글자를 쓰려면 막상 당황하기도 하고 잘 쓰지 못하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자판으로 한자를 입력하는 바람에 읽을 줄 알고 타이핑할 줄은 알지만 손으로 쓰지는 못하는 겁니다. 영상을 보고 혀를 끌끌 차기보다는 도리어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한자를 꼭 손으로 다 쓸 줄 알아야 할까. 사실 저도 읽을 수는 있는데 막상 쓰려면 머뭇거리곤 합니다. 현대인의 퇴화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진화라고 합시다. 세상과 함께 사람도 바뀌고, 읽고 쓰는 법도 바뀌는 것.
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면서 쓸모없는 교육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치르게 하지 않아요. 아비가 한문을 가르치지만 한자능력검정시험 몇 급을 따도록 할 생각도 없습니다. 행여 저가 마음을 먹고 욕심을 내면 다를 일입니다. 그래도 무식하게 한자를 쓰고 외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쓰지도 않는 옛 글자를 애써 쓰다가 한자를 싫어하고 나아가 거들떠보지도 않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닙니다. 좋은 책을 소개하고, 그 책 속에 있는 한자 표현을 묻습니다. 일상에서 쓰이는 다양한 용례를 떠올려 보라 이야기합니다. '족히'라는 부사어를 보고 '만족', '부족', '풍족', '흡족' 등을 떠올리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물론 글자도 쓰게 합니다. 그러나 글자를 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한자와 친해지는 게 목표입니다. 글자를 보고 낯설지 않을 만큼.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나중에 저가 일본어나 중국어를 공부할 때, 혹은 고전문학이나 한문을 공부할 마음이 있을 때 그때 필요한 글자를 외도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