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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Dec 01. 2022

아싸 장자 헛소리도 잘하시네

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었다고 해야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어쨌든 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 때문에 낯선 서울 생활을 선택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그나마 서학西學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철학과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철학과 대학원 생활은 별로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무엇을 배웠는지 도통 기억에 남지 않는 까닭입니다. 충실한 학생은 아니었나 봅니다. 대학원보다는 연구실(수유+너머)의 공부를 좋아했습니다. 대학원 수업에서도 <장자>를 조금 배웠고, 연구실에서도 <장자>를 조금 읽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오롯이 홀로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혼자 공부하신 건가요?" 참여자분의 질문에 문득 십 년 넘은 지난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동양철학 전공자로 둥둥 떠다닌 시간이 생각나더군요. 대학원에서 공부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철학과에서 '동양철학' 전공은 곁다리에 불과한 까닭입니다. 게다가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에 불만을 가득 품은 저에게 동양철학 교수들의 태도는 너무 게을러 보였습니다. 세상은 미쳐 돌아가는데 신선놀음하는 듯 보였다고 할까요. 연구실 공부는 좀 나았지만 그래도 전공의 간극은 있었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무리가 있었고, 국문학을 공부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푸코와 맑스를, 한쪽에서는 연암과 명리학을 이야기하는데 어정쩡하니 어느 쪽에도 끼지 못했습니다.


동양철학이란 정체성이 모호한 학문이었습니다. '철학'이라 하기엔 늘 주변부에 있었습니다. '동양철학도 철학이냐'는 식의 질문이 날아오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사상적으로 매력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너무 태만하고 느긋하게 세상사를 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부모는 철학관을 내려느냐 묻곤 했는데, 한쪽에서는 명리학에 열중하기도 했습니다. 동양철학을 공부했으면서 사주도 보지 못하느냐 핀잔을 듣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바꾸지도 못하고, 세상을 해석하지도 못하는 학문. 먼지가 폴폴 날리며 낡은 냄새가 나는 학문. 이를 왜 붙잡고 있을까 수없이 의문이 들었습니다. 


학계에 뛰어들면 좀 나을까. 그러나 모난 성정이라 학계에 등을 돌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게을러 논문을 읽지도 않고 논문 투의 글을 쓰지도 않습니다. 십 년 넘게 공부하면서 동양철학 혹은 중국철학 전공자를 만난 것이 손에 꼽습니다. 그냥 혼자 공부했다는 게 맞는 말입니다. 


몇 해 전,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부단히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학자라는 감투를 신경 쓰지도 않을 테지만 그때는 나름 간절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함께 공부한 이들은 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저마다 제 자리를 찾아가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느냐는 한탄. 공부를 그만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그 해 기회가 있어 <논어>와 <장자>를 강의했습니다. 제 딴에는 <논어> 강의에 힘을 쏟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한 까닭입니다. <장자>는 그냥 홀로 읽고 공부한 까닭에 별로 자신이 없기도 하고. 그러나 <장자> 강의가 더 좋은 호응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학위가 없다는 데 스스로 환멸을 느낀다는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고 학위를 따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럼에도 학위가 없다는 것이 스스로 제 자리를 의심하는 이유가 되곤 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혼자 헛소리는 아닐까. 제 혼자의 아집, 혹은 갇힌 생각은 아닐까. 오독이나 과장, 흰소리를 떠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래도 학위 같은 훌륭한 방패 뒤에 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근본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무책임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없고, 제 멋대로 풀이하고 해석한 것이니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그렇지만 나름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해석을 참고하지 않았기에 모두 나의 것입니다. 나의 말이며 나의 풀이입니다.


<장자 내편>을 번역한 <장자씨 헛소리도 잘하시네>를 나누며 고민이 많았습니다. 멋대로 번역한 이 글을 나누어도 될까? 나름의 고민과 갈등의 시간이 적잖이 길었습니다. 그래도 이번 기회를 통해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다른 해석과 번역이 더 있다는 게 좋은 일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멋대로 번역하고 옮긴 것이지만 아직은 <장자> 번역이 많지도 않으니 하나의 번역이 더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컴퓨터 속에 오래 잠들어 있던 글을 나누었습니다. 


"직접 생각하신 건가요?" 어느 강의에서 들은 질문입니다. 뭔가 좋은 말을 한 거 같은데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어디서 빌려온 것일까. 따로 빌려 온 것이 아니니 제 생각이라 둘러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누군가의 말이나 글에서 본 것일지 모릅니다. 스스로 번역한 글을, 써 놓은 글을 보면 낯섭니다. 스스로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장자 내편>을 옮긴 <장자씨 헛소리도 잘하시네>를 읽으며 내내 들었던 생각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낯설지만 나름 괜찮다 생각했다는 점.


다른 누구의 해석을 따르거나,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읽고 풀이했다는 점에서 오롯이 스스로의 글과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는 나의 것이 아닌 마냥 낯설게 느낀다는 역설. 이러한 역설 속에 제 스스로의 글을 좀 다른 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찾고 싶습니다. 


<장자>를 편향적으로 옮겨 <장자씨 헛소리도 잘하시네>를 내놓았습니다. 한편 장자를 다른 맥락에서 읽어보고자 <아싸 장자>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습니다. 제 편향과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철학이란 늘 특정한 목적에 봉사하는 까닭입니다. 저는 저항과 반항의 철학에서 <장자>에 주목했습니다. 전복과 비판의 철학에서 <장자>를 읽었습니다. 이는 수많은 해석 가운데 하나일 테지만 <장자>를 다르게 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편향과 의도한 번역 혹은 해석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색깔 있는 관점이라 볼 수도 있고 특정한 방향에 오염된 몹쓸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가능한 귀 기울여 듣되 스스로의 길을 찾는 걸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 & 다짐을 뒤로하고 직간접적으로 전달할 이야기가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감사히 읽고 고민해보겠습니다. 




https://zziraci.com/book/kuangrenzhuang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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