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인스타그램을 뒤적이다 긴 장문의 글을 읽었다. '창비'에서 올린 글인데, 내용인즉 저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아몬드> 공연을 진행했다는 것. 출판사의 입장문과 저자의 입장문이 함께 올라와 있어 쌍방의 이야기를 모두 볼 수 있는데, 출판사와 극단이 저자의 동의 없이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워낙 유명한 책인 데다 한쪽의 과실이 선명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댓글 민심은 들끓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 시큰둥한 마음으로 지나치려 하나, 문장 한 구절이 마음을 후벼 판다. 저자는 '어떤 부당함이라도 기꺼이 받을 각오가 돼 있을 만큼 절박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과거 책이 출판되기 이전 편집자가 저자의 동의 없이 '삭제/편집'한 기억 때문이다. 한편 이에 대해 한 댓글에서는 '작가의 작품에 마음대로 칼질을 했다니, 그리고 그 긴 수개월 동안 작가를 얼마나 우습게 알았으면 묵인하고 뒤에서 조정을 했을까…'라며 한탄한다.
나 역시 비슷한 기억이 있다. 편집자가 보내온 교정 원고에는 내가 쓰지 않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것저것 있는 대로 자료를 찾아보니 어떤 이의 주장을 더해 실어 넣은 것이었다. 낯선 내용을 보고 나는 일종의 모욕감을 느꼈다. 우선은 아무런 이야기 없이 내 스스로 덧붙인 내용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나아가 내가 무시하고 배척한 내용을 덧붙여 놓은 것을 보며 편집자가 나를 저자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국 나는 저항하기로 마음먹었고 수차례의 메일을 주고받은 끝에 책을 출간하지 않기로 했다. 그 원고는 아직도 내 컴퓨터 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시간이 흘러 편집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면도 있다. 어쨌든 그는 편집자이자 출판업자로서 책을 '상품'으로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더해 넣는 것이 상품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겠지. 저자는 상품을 만드는데 미숙하니 크게 보아 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내 글을 오롯이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욕망이 상품이 되는 것보다는 더 소중한 까닭이다.
그러나 비극은 피할 수 없다. 댓글에서는 '작가의 작품에 마음대로 칼질을 했다'며 한탄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편집자가 저자의 글을 '삭제/편집'할 때에 그것은 '작품'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작품이 되는 것은 상품이 된 이후에나 가능하다. 모두가 작품을 쓰고자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상품이 되지 못하면 작품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저자는 결코 작가가 되지 못한다. 상품이 되지 못한 글은 그저 의미 없는 문자 덩어리에 불과하다. 한 푼의 가치가 없으며, 나아가 돌아볼 가치도 없는. 내가 지금 쓰는 글이 그렇다. 이 글은 한 푼도 생산하지 못할 운명임을 잘 알고 있다. 기껏해야 몇 비트의 데이터를 소모하겠지.
편집자의 관행을 두둔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나 이 비극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문제를 다루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상품이 되고자, 한 편의 글로 푼돈을 마련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굴복하는 지점을 바라보지 못하면 그냥 하나의 시끄러운 야단법석으로 지나치지 않을까. 저자가 예감한 것은 자신의 작품이 2차 저작물로 사용되는 데 작동하는 변명 일 테다. '작가에게 좋은 것'이니까. 2차 저작물로 유통되면 저자는 부수입을 얻고, 책도 더 잘 팔리고 운운.
저자는 '즐거운 독서 경험'을 이유로 영상화 등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과 무관하게 좋은 상품이 되기 위해 자신의 권리와 신념을 팔아넘겨야 하는 일들이 더 많다는 현실이 씁쓸하다. 아마도 어떤 창작자는 그의 선택을 부러워할 것이고, 어떤 창작자는 그의 주장에 고마워할 것이다.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마냥 부러워할지, 마냥 고마워할지. 글은 어떻게 화폐가 되는가? 어떻게 책을,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까 하는 질문에 시달리는 입장에서 복잡한 마음이다. 아무 가치 없이 온라인을 떠돌 이 글을 적는 시간에 상품이 될만한 글을 지어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편집자는 나에게 작가로 벌어먹고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비난의 말을 퍼부었다. 그 말은 맞았고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예전만큼 아픈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작가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아니, 글로 벌어먹고 살아야 작가입네 할 수 있는 이 땅에서. 환영처럼 들러붙는 그의 말을 뒤로하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것은 내 글을 반기는 몇몇의 친구들 때문이다. 좋은 상품이 아니어도 글에는 제 고유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스스로 작가입네 소개하는 것은 저항이자 하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작품을 써야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내 글이 좋은 상품이 되었으면 하는.
등가교환이라는 법칙이 이 세계에서는 별로 통하지 않는 듯하다. 글은 화폐가 되지 못하며, 쌀이나 고기, 생필품이 되지도 못한다. 하여 글을 쓴다는 것은 한낱 무가치한 일이기도 하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 그럼에도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 비극을 직시하면서도 글을 쓰는 것은 단단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뎌졌기 때문일까. 저 비극을 직시하면서도 상품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속물이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전히 간절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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