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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헌법의 추억

by 기픈옹달

헌재가 유의미한 존재로 각인된 사건은, 관습헌법을 들먹이며 수도는 서울이라고 못박은 일이었다. 이런 유치한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괴이한 해석이지만 그와 비슷한 일이 도래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법이란 저항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리가 아니라, 억압할 수 있는 최대한의 꼼수가 아닐까.


무튼 이런 험한 생각 속에 스무해 전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스스로를 헤아려본다. 이른바 촛불 정국에 매일 같이 광장으로 나갔는데, 지금의 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도리어 눈에 짓밟히는 늙은이들의 열정에 눈이 간다. 저들은 어찌 저리 천진난만하게 몸을 불태우는가.


생각은 그 시절보다 전위적이지 못하고, 행동은 저들보다 뜨겁지 못하다. 생각도 늙었고 몸도 낡았다. 변명을 해보자면 실망이 늘었고, 좌절의 경험이 쌓였으며, 결과적으로 인간에 대한 환멸에 우울이 지배하는 상황. 나름 주절대며 스무 해를 살았는데 영 변변찮은 존재가 되었다.


내 나이 또래와 비교할 때 제법 어린 세대를 많이 만났다. 그래서 훈계어린 소리도 많이 했는데 돌이켜 보면 대부분이 흰소리에 불과하더라. 정의감에 주먹을 흔들며 지껄이던 말이 부끄러워지는 시절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도 못했으며, 그 시절 정의가 옳다는 생각에 회의를 품기 때문이다.


조금 빗나간 이야기일 수 있으나, 이제 청소년이 된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살아라며 길을 제시할 자신감이 없다. 어쩌면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다. 나의 길은 나의 길이며 그의 길은 그의 길이라 생각하는 까닭에.


그건 존중일까 방치일까. 나는 참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다. 제 좋은 맛에 사는 사람이며, 설득이 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시키는 일은 도무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남에게 무슨 일을 시키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도 마찬가지.


이런 냉랭한 정감 가운데 쓸데 없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저 야수가 짐승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시절에도 그작그작 잘 살지 않았나. 계엄 이전과 계엄 이후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에 그치는 걸까? 거꾸로 이런 일이 있겠구나 라는 체념이 반쯤은 있지 않았을까.


상상도 못할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 짓을 벌일만한 괴물이 그 짓을 저지른 것. 그렇다면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그 괴물은 어디서왔는가. 그 괴물이 의외의 사건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과하게 말하면 계엄의 씨앗은 윤건희 이전 어디에서 잉태되었을 것이다.


저 괴물이 쉽게 죽지 않으리라는 것이 자명하다. 구속에서 풀려났고, 어쩌면 의회의 모든 탄핵이 기각될 수도 있다. 12.3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 과한 상상이냐는 문제는 접어두고,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뭐가 다를 테냐 하는 절망감이 스며든다는 게 문제다.


나도 단죄가 간절하다. 탄핵절을 맞으면 축배를 들어야지. 미리 기분좋게 마음을 먹어 놓았는데. 그게 그냥 철없는 짓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축배를 들고 조리돌림해야지. 용산에서 빠져나와 서초동으로 가는 길에 응원봉이라도 빌려서 가져나가 흔들고 싶다.


그러나 그 이후를 벌써 맛보았다는 불길함이다. 축배를 들고 신나겠지.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시원하겠지. 잠도 잘 오고, 싄나싄나 하겠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어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그 괴물 탓이 아닐 테다.


나이가 들어 생각이 많아진 것일까. 잡생각이 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회색주의자가 된 탓일까. 내가 스스로에게 자꾸 질문을 던지는 것은, 공화국의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는데 그치면 안된다는 점이다. 내가 언제 이 나라를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다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문제는 공화국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는 거다. 탄핵과 내란 처벌의 결과가 대한민국 만세면 안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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