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헌디!

2018 선농인문학서당 #2

by 기픈옹달
유자가 말했다. “함께 사는 세상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조율이 필요하죠. 그래서 사회적인 질서와 규범이라는 게 만들어진 건데 아무래도 좀 엄격하고 딱딱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실제로 쓸 때는 잘 어울려서 조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하는 게 매우 중요해요. 옛날 아주 훌륭한 정치를 펼쳤던 지도자들의 통치방법에서도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죠. 그래서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사람 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해서 잘 어우러지게 하는가 하는 원칙에 따라 처리했어요. 그렇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요. 조화롭게 해서 잘 어우러지게 해야 한다는 것만 알아서 마냥 조화롭게만 하려고 하고 질서와 규범으로 틀 잡는 걸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치우쳐서 어느 한쪽만 선택하는 건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1-12>
:: ’예절’이란 말을 구성하고 있는 두 글자의 뜻을 살펴보자. ‘예禮’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적절히 조절하기 위한 사회적인 질서와 규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절節’은 대나무에 있는 하나하나의 마디처럼 그 ‘예’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상황별로 펼친 세부적인 실천 지침들을 가리킨다. 결국 예절은 함께 사는 사회에서 인간이 서로 배려해야 한다는 정신과 그 실행 방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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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이라고 하면 어떤가요? 딱딱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예절이라는 이름으로는 늘 무엇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기 때문일 거예요. 어찌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많은지... 어렸을 적부터 세세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예절의 그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툭하면 예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예의가 없다. 예절을 모른다’는 말을 듣나요? 혹은 어떤 경우에 그런 생각을 하나요?


<군자를 버린 논어>에서는 ‘군자’만 버린 것은 아닙니다. <논어>니 공자니 하면 떠올리는 많은 것을 다른 의미로 풀이한 부분이 많아요. 여기서는 ‘예禮’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조율’이라고 풀었어요. 무릎을 치게 만드는 풀이입니다. 실제로 ‘예’의 본래 의미에는 사람간의 관계를 조절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어요. 공자보다 예를 더 강조했던 인물로 순자가 있습니다. 순자는 무한한 욕망이 사람간의 다툼을 낳는다고 보았어요. 저마다 바라는 것은 많은데 사물에는 한계가 있기 나름이지요. 이를 조절하는 것이 바로 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역자의 말처럼 ‘사회적인 질서와 규범’이라고도 풀 수 있어요.

그런데 대체 왜 우리는 예절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를 떠올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가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가르는 방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에요. 옛사람들은 사람 사이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질서를 잡는 것이 바로 ‘예’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하 관계에 대해 매우 민감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어요. 어른과 아이, 노인과 청소년,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형과 동생 ... 나아가 남자와 여자까지.

이제는 낡은 유물과 같은 말이 되었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말이 있었어요. 여기서 ‘존비尊卑’는 서로 짝을 이루는 말입니다. ‘존’는 ‘존귀尊貴’, 높다는 뜻이예요. 반대로 ‘비’는 ‘비천卑賤’, 낮다는 뜻이지요.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는 말입니다. 앞에 소개한 다양한 짝들은 모두 앞이 높고 뒤가 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순서가 있어야 한다고 할 때에 그 순서는 아무렇게나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당연히 어른이 먼저 아이는 나중에!

지금도 지키는지 모르겠지만, 식사예절에는 어린 사람이 먼저 수저를 들고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범이 있지요. 참 어리석은 규범이에요. 대체 왜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밥 먹는 일까지 세세하게 순서를 정해놓고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네요. 그럼 순서 없이, 예절 없이 아무렇게나 먹어도 되는 거냐? 글쎄요. 무질서한 식탁보다는 순서가 있는 식탁이 보기도 좋고 아름답기는 합니다. 다만 순서가 꼭 어른이 먼저일 필요는 없지요. 기왕 순서가 있어야 한다면 밥 차리는 사람이 수저를 들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떨까요?

이런 질서와 순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삼강三綱’이라는 가치입니다.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 이 셋을 모아 삼강이라 불러요. 대표적인 세 가지 관계에서의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신: 군주와 신하 관계, 부자: 부모와 자식, 부부: 남편과 아내, 이렇게 세 관계가 있습니다. 이쯤 되면 그 질서라는 게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거예요. 군주, 부모, 남편이 먼저가 되고 신하, 자식, 아내가 뒤처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綱’은 ‘벼리'로 번역이 되는데, 벼리란 그물을 당기는 줄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군위신강이란 군주가 당기는 대로 신하가 따라와야 한다는 뜻이에요. 마찬가지로 자식은 부모를 아내는 남편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삼강이지요.

위아래, 먼저와 나중으로 철저하게 나누어 있어 이 예절이라는 게 참 불편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이 많았던 것은 따라다녀야 하는 존재가 많았다는 뜻이기도 해요. 선생, 부모, 선배 등등의 말을 따라야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러고 보면 지금 저에게 ‘예’에 대한 압박이 별로 없는 것은 예절이 요구되는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선생, 아버지, 어른의 자리에 있으니까요. 이 관계가 역전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신하 말을 따르는 군주가 낯설듯 학생, 아이, 자식의 말을 따르는 경우는 좀처럼 볼 수 없지요. 그래도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학생, 아이, 자식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사실이에요. 허나 오늘의 주제인 ‘예’를 떠올려봅시다. ‘예’를 요구하는 건 선생, 어른, 부모인가요 아니면 학생, 아이, 자식인가요?

‘예의 없는 아버지’라는 말은 얼마나 낯선지요? 거꾸로 ‘예의 없는 딸’이라면 어떻습니까? ‘예의 없는 선생’과 ‘예의 없는 학생’을 생각해보세요. ‘예의 없는 노인’과 ‘예의 없는 청소년’도 생각해봅시다. 상대적으로 앞의 표현이 낯선 것은 ‘예’가 누구에게 강요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예'는 결코 평등한 관계에서 출발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도 평등한 관계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구요.

따라서 <논어>의 ‘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관계의 양상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의 조율’, ‘사회적인 질서와 규범’ 모두 좋은 말입니다. 허나 이를 위해서는 평등한 관계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어요. 상하의 불평등한 관계에서는 서로간의 관계를 조율하기보다는 누가 먼저고 누가 나중인지를 확정하는 일만 남습니다. 질서와 규범 역시 한쪽에게만 강요될 뿐이지요.

인용한 <논어> 문장에서는 ‘화위귀和爲貴’, ‘예’를 실행하는 데는 조화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것이 <논어>에서 말하는 ‘예’의 정신입니다. ‘예’는 누군가를 강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상호간의 관계를 조절하고 원만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이예요. 이 목적을 생각하면 구체적으로 ‘예’를 어떻게 실천할지 끊임없는 숙제로 남습니다.

본디 조화(和)란 서로 같지 않은 것을 어울리게 한다는 뜻이에요. <논어>의 이 문장을 곱씹어 보면, 수많은 낯선 관계가 활짝 열려있는 오늘날이야 말로 ‘예’가 한층 더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예'에 대해 제대로 상상하려면 지금의 질서를 버리고, 위아래의 구별을 떠나 상상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예'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지 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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