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종을 구분하는데 많은 요소가 있다. 나는 기껏해야 이파리의 모습이나 꽃의 모양 정도를 보고도 겨우 구분이나 할 수 있을까? 식물에 대한 지식이 짧아 항상, 풀이나 나무 정도인 줄 알고 지나쳤다. 그리고 애써 나무는 나무들일뿐 나무의 종류를 분간하는 게 삶에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휘뚜루 마뚜루한 태도로 공을 들여본 적이 없다. 시골출신이지만 학령기 전 상경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연에 대해 시큰둥한 태도로 여태껏 살아왔다. 나의 지인들 중 수종을 잘 아는 이도 드물었으니 '중요한 시선'이 아니라 넘겨버리는 태도에 궁색한 변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흔하디 흔한 풀과 나무의 이름을 잘 몰라 물어볼 때, 낯이 붉어지곤 한다. 때론 그것이 죄스럽기도 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굳건히 살아있기 때문에 인간이 기대어 사는 것이라면 '그들의 이름정도를 꿸 수 있는 게 예의 아닐까'싶어서다. 함께 오랜 세월 함께 하는 이의 이름을 타인과 구분할 수 없다면 미안함에 그치지 않고 죄스러울 그런 기분이라고 할까. 이 시를 감상하면서 서두가 길었다.
시인은 꽃이 진 나무가 이름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확장되어 신록이라는 더 큰 이름을 부여받는다고 한다. 푸른 숲이라는 정체성으로 더 큰 경계로 지칭해 준다. 도리어 꽃이 지지 않는다고 반어적으로 말하며 꽃을 떨어트리고 더 큰 꽃을 피워, 나무 자체가 큰 꽃이 된다는 표현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꽃의 색을 지정하고 초록은 이파리에 국한된 색이라는 편견에 갇히면 꽃이 떨어진 나무를 꽃으로 볼 수 없다. 한 덩이의 큰 꽃으로 모습을 상상해 보면, 나무는 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럽고 이파리들이 모여 만드는 윤곽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머릿속에 꽃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떠올리는 버릇을 버린다면 나무만 꽃이 아니라 동그마니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도 한 덩이의 꽃이라 할 수 있고, 꽃들이 모인 꽃다발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시인의 눈은 고정되지 않아 사물과 자연을 다르게 보고 비틀어보며 독자들의 시선을 확장하도록 만들어준다. 익숙한 일상을 다르게 보는 시선을 "시심"이라하며 작가적 시각이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