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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Jan 21. 2019

________부부의 페어플레이

희생, 그게 뭐니. 바라지도 마라

남녀가 풋풋할 때 갑은 여자고 을은 대개 남자다. 남자는 한눈에 반한 여자에게 올인한다.(대개 그렇다) 만약 남자가 뭉그적 거린다면 그 여자가 마음에 많이 들지는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에게 애매한 것은 없다. 전기가 찌릿 통한 그녀에게 바치는 모든 시간이 아깝지 않게 된다. 그녀를 만나러 3시간을 달려가면서 "오빠잖아~"라고 말하는 종족이다.


어쩌면 결혼 전 그녀에게 올인하는 것이 남자에게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보 일지 모른다. 생물학적으로 우수한 상대를 결정하고자 하는 저돌적 돌진이라고 해보자.


지고지순한 사랑이 원인이든, 목표를 향한 돌진이든 나는 어쩌다 그 남자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연애 기간 동안 땅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고 민망한 건 내 몫이다. 사람들이 내 얼굴을 훑으며 '돈이 많은가'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 우스갯소리도 들었었다고 살며시 붉히며 고백해본다. 돈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는 현실.


이유를 모른다. 그 남자의 이유 없는 갈구의 대상이 되는 메커니즘을 모른다. 그에게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었고 나는 마냥 도도해졌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 남자는 나를 점찍었고 2년 동안 도끼의 날을 갈아 기회를 노렸다. 세 번의 기회를 통해 나는 마음 문을 열었다.  4년의 장기 연애를 통해 군입대와 제대까지 기다려준 열혈 고무신녀가 되었다. 나의 인내의 클래스는 희생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제대 15일 만에 결혼식을 치렀다. 부모님의 잔치에 숟가락만 얹을 뿐이었다. 결혼이 결정되니 일사천리로 청첩장이 나왔다. 부모님이 지인들에게 일시에 뿌리셔서 광고도 수월했다. 성수기여서 구하기 어려운 예식장을 기적처럼 예약했다. 하늘의 뜻이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가 보다. 남편이 나의 반쪽이라는 하늘의 뜻이 아니면 이루지 못할 일이 한 달 안에 이루어졌다.


2년의 애달픈 을의 적극적 데쉬와 4년 연애의 공주대접을 통해 결혼 후 이상을 꿈꿨다. 나를 대접해준 반쪽의 지극정성을 바란 것이었다. 뚜둥~세상에 통용되는 원리는 우리에게도 드러났다. 현실의 생계와 책임이 우리 앞에 놓였다. 공주 지위에 취해있던 나에게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라고 등을 밀어준 사람은 바로 남편이었다.


바라던 이상을 조금 낮추었다. 현상유지. 연애 때처럼만 하는 것도 고마울 정도였다. 그런데 둘이 앉아 서로 쳐다보기만 하면 월급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현상유지도 요구할 수 없었다. 매달 장미꽃을 사는 낭만을 누릴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아니, 남편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이건 흥, 칫, 뿡이다)


둘은 각각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이 걸어가야 했다. 업혀서 편하게 갈 수 없는 험난함이 우리 앞에 있었다. 나는 용감해져야 했고 공주가 되고 싶은 망상을 버리게 되었다.


아이를 낳았다. 저절로 생기지 않는 모성애에 사뭇 놀랐고 6개월 이상 아이의 뒤를 닦아주면서 정이 들었다. 아이의 숨소리와 눈빛에도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아는 초능력이 함양되었다. 모성애는 길러지는 훈련의 결과물임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달랐다. 아이를 분신처럼 느끼지 못했다.  나에게 생긴 모성애는 생기지 않았다. 물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육아에서 객관적 지시에 신속하게 응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해 타박을 많이 받았다. 여자가 화가 나면 보고도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듯 아이를 돌보면서 직감이란 작동하지 않았다. 말해줘야 알아채는 종족이 내 옆에 멀뚱멀뚱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내 남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인들을 만나면 이미 맞춘 듯 같은 이야기를 했다. 아내라는 우리들은 아기를 봐주나 오래 안고 있지 못하는 종족이 이상해 보였다. 아이를 안고 십여 가지 일을 해치우는 여자와 달리 아이의 울음 하나에도 어쩔 줄 몰라 아이를 넘겨주는 방법론이 xY염색체에  날 때부터 입력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가르쳐주고 팁을 알려주어도, 아이가 빼~우는 것, 와앙~울 때, 찢어질 듯 울면 기저귀만 만져대는 행동이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여자들은 불만이 폭주했다.


부성애가 없다는 것을 탓하기만 하면 갈등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차라리 각자 잘하는 것을 하자고 의논했다.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되었다. 정확하고 눈에 보이며 결과가 명확한 영역을 부탁했다. 아니, 일방적으로 맡겼다. 나의 영역에 비해 가짓수가 적고 노동의 양도 적지만 그것만 해도 최선이었다. 그 영역은 설거지, 분리수거, 음식물쓰레기 버리기였다. 정말 나는 너무 어리석었다. 더 맡길 수 있었는데 말이다.


반쪽은 그 정도는 거뜬히 해냈다. 성실하고 우직했다. 눈치로 알라고 흘려볼 때보다 감정적 갈등이 적어졌다. 남편도 눈치만 보고 이유를 몰라 머리를 긁적이는 행동이 줄어들었다.  그러고 사는 게 바빠, 아이 키우는데 서툴러 서로를 탓하기도 하고 서로를 의지하기도 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서로가 존재하는 것으로도 든든한 사이가 되었다. 과하게 희생하지 않고, 이상적 기대치를 많이 낮추었다. 과하게 희생하지 않으니, 그의 과한 희생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생업으로 무거운 것처럼 동반자요 친구요 배우자인 당신도 무거울 테니까, 물론, 남편은 나에게 과하게 요구하지 못했다. 이미 과중하게 살아가는 내가 안쓰러웠으니까. 안쓰러워도 내가 시켜야만 움직이는 것은 안 비밀이다.


어느덧 함께한 시간이 오래되어 두꺼워졌다. 아침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현관 앞이 말끔하다. 출장으로 둘 다 바빴던 터라, 분리수거 할 봉지 여럿을 그냥 둔 날이 며칠이었다. '덜 바쁜 사람이 해야지'라고 생각하고 내가 하려던 참이었다. (내가 한참 희생적인 것은 숨길수가 없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 우직하게 정해진 일을 잊지 않고 해온 남편의 선행이다. 아니, 그의 과업이다. 선행은 무슨! 내가 말하지 않아도 하는 요령이 붙었다. 알아서 불편하면 해치우는 페어플레이의 요령이다. 문자로 "우리 집 우렁각시 출동하셨네요"라고 보내줄 생각이다. 궁디팡팡이면  골골거리던 힘도 불끈 솟게 하는 비결이다.



내가 아프면 어깨를 주물러 주는 것은 귀찮아해도, 음식물과 설거지, 그리고 분리수거는 일사천리로 미리 해놓는 습관이 아주 노련하다.

희생까지  바라지는 않는 우리의 페어플레이




2016.12-영남문학 겨울 시 부문 신인상

2018.12- [당신 곁의 사랑을 확인하세요] 공저시집  출간

2019.1-서울시인협회 청년 시인상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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