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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Mar 20. 2019

카프카<변신>황당하셨어요?

황당한 전개와 죽음의 의미


아이들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수업을 할 때면 자주 경험하는 대화가 있다.


“선생님, 황당하게 써도 돼요?”

선생님, 미래로 가는 이야기도 되요?”

저학년은 판타지라는 장르를 몰라 그렇게 말한다.

선생님, 좀비이야기는요?”

게임스토리처럼 비슷하게 써도 되요?”

     


그런데 이렇게 질문하는 용감한 아이들의 표정은 영 어딘가 불편하다.



마음껏 쓸 수 있는데 왜 인상을 찌푸리니?”

현실적이지 않아요

현실적이라는 게 뭐니?”

황당하지 않아야죠.”

     

     

황당한 이야기를 텍스트로 정하고 수업을 진행했다. 너무 많이 알려져 모르는 이가 있을까 하는 작품이다. 사실 독서에 매진하고 인문도서를 읽겠다고 년 초에 작정한 사람은 누구나 권장도서 목록에서 한 번씩 볼법한 제목이다. 체코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40대에 지병을 앓다 일찍 저세상을 간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작품에서 아이들이 말한 황당함을 느낀다.

     

왜 벌레로 변해요?”

어떤 벌레요?”

잘못한 게 많은가 봐요. 큰 동물로 변하지 징그러운 벌레로 변한 건 좀 아니잖아요

바퀴벌레인가요?”

     

고학년이나 중학생들은 사건의 논리적 파악을 위해 이유를 파헤치고 싶어한다. 작품의 그 어디에도 벌레로 변한 이유는 밝히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 중 사건의 원인을 밝히지 않아 독자들이 당혹감을 느게끔 하는 이야기는 적다. 그런데 <변신>은 매우 당혹스럽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도록 벌레로 변한 연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아주 불친철하다. 심지어 이야기 속 인물 그 누구도 주인공 잠자의 변신의 이유를 알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주인공도 자신이 벌레로 변한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통곡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이겠거니 하다가 영 돌아올수 없다면 울며불며 도움이라도 요청해야 정상 아닐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해야 정상이다.

     

주인공은 벌레로 변한 자신을 아무런 거부 없이 받아들인다. 그는 스스로 벌레의 무기력에 적응한다. 하소연거나 고함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놀랄 가족을 배려한다. 작가는 잠자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카프카는 아버지의 폭력성 아래 억압받으며 자랐다 . 자기 뜻대로 무엇이든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성인이 되어도 자신의 진로를 아버지에게 맞춘다. 유일한 해소가 문학을 통해서 이루었지만 밥벌이도 못하는 쓸모없는 짓이라는 평가를 가족에게서 받는다. 특히 아버지의 몹시 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숨어서 글쓰기에 탐닉한다.

     



그가 글을 쓰는 동기는 아버지로 인한 무기력에서의 탈출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왜곡된 메시지를 거부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으로 수용해버린 흔적이 그의 일기나 기록에 남아있다. 무가치하며 무력한 벌레처럼 인식하면서 그 벌레같은 자신을 작품에 옮겨놓았다. 유일학 숨통을 트여주는  문학을 통해 해소를 갈망했다. 글을 쓰고 있을 때는 다 잊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아버지의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과연 그는 문학을 통해 구원을 받았는지 질문해본다. 무가치하다는 평가에서의 탈출, 아버지의 폭력적 말과 시선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는 글을 쓰면서 옥죄는 부정적 굴레에서 걸어나올 수 있었을까?


작품 속 주인공의 귀결은 죽음을 맞이한다. 작가에게 죽음은 탈출구와 같다. 아버지에게서 탈출을 위해  죽음이란 장치를 가져온다. 아마 그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버지가 규정한 규범앞에 좌절했을 것이다.결혼을 하려고 결심하다가도 속박에 두려움을 나타내며 파혼하기를 반복했다. 그의 소설의 결말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죽음이라는 단절로 처리한다.

     

죽음밖에 없었을까? 정한 반응의 가족 곁에서 잊혀지고 버려지며 사는 것보다 죽음이라는 결론을 내는 것이 쉬웠을지 모른다. 그는 실제로 폐결핵을 앓았고, 병의 치료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죽음의 시간표를 지연하기 위해 요양을 가면서까지 낫기를 갈망했다. 살기를 갈망하는 만큼 그에게 죽음은 치열한 문제였다.


<변신>은 이유를 알수없이 세상사에 홀로 내던져진 기분을 안고사는 무기력한 현대인들의 당혹감을 표면에 드러낸다. 괜찮은듯 살고있지만 바닥에는 자괴감과 무력감이 가득 깔려있다. 외부세상은  이유도 모를 불합리가 넘쳐난다. 관계의 단절로 그 어디에도 깊은 공감과 위로를 주는 이가 없다. 진정한 일체감을 느낄 공동체는 산산조각난지 오래다. 오늘날 우리들의 초상이 이 황당한 이야기와 연결되어있을 것만같아 소름이 돋는다.

     


 선생님 더 황당하게 써도 돼요?”

라며 눈치 보는 아이들에게 어떤 대답을 했을까?

황당한 이야기를 통해 말 하고 싶은 주제를 나타낼 수만 있다면 자유롭게 써봐그렇게 소설을 쓰는 어른들도 많단다. 단, 황당하게 써서 당황스럽게 만들길 바란다."

 

아이들이 신나게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글이 술술 풀린다. 황당하고 어른들 눈에 쓸데없다고 보이는 이야기를 쓰면서 아이들은 연신 웃음을 잃지 않는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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