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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Mar 20. 2019

-다가오는 말들-역시 그녀!

다가오는 말들에서 건져 올린 말들



작가와의 주관적 조우로 밝혀진 나의 길

     

10년 이상 글쓰기 공동체를 이끌어오며 자신을 옭아매는 억압과 관습을 벗어나려 했던 작가를 안다. 타인을 가슴에 품고 그들에게 닥친 이유도 모를 폭력에 보고문이 되어주는 은유 작가를 만났다. 책으로 여러 번 만났고, 이번 신간으로 다시 만났다. 그녀만 나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나는 분명 만났다고 떠벌리고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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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다시 시를 쓰겠다고 시작한 글쓰기가 마뜩잖았다. 어려웠고 혼자였다. 떠오르는 말과 소리를 다 담기에 나의 실력은 역부족이었다. 시라는 장르가 쉽지 않았다. 쉽지 않다고 말해주는 선견자가 없어 모르고 출발했다. 출발한 이상 후진이 없는 외길이었다.

     

이전에 나는 산문 장르에 손을 뻗지 않았다. 시를 겨우 읽거나 생각했다. 에세이, 소설 등 내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문학 도서에 오래 머물렀다. 잘 쓰고 싶었고 읽히고 싶었다. 나의 수준과 이상의 차이 앞에서 절망하던 중, 글쓰기에 대한 책을 고르다가 은유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글쓰기의 기능을 엿보려다 그녀의 삶 앞에 잠시 머뭇거렸다. 요즘 말로 낚였다. 그녀는 자신과 가족만 말하지 않고  다양한 소시민의 삶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작가의 생각에 가까워지고 싶었고 이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의 책을 통해 나의 글쓰기의 목표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왜 쓸 수밖에 없는지 답을 약소하게 얻었다. 그러고 누구를 위한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도 일부 얻었다. 그녀는 내게 가까운 사람이 되었고 스승이 되었다. 이웃집 언니처럼 함께 울고 웃는 동료 이상의 감정이 생겼다. 작가가 오롯이 짊어진 결혼과 육아의 삶이 이 시대 다수의 여성을 대표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공감 못할 여성이 있을까 싶었다. 그녀에 대한 호감이 그녀의 문장에 대한 호감으로 발전했다. 사실 그녀의 문장에 낚여 그녀의 삶으로 이동한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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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익히 알고 쓰던 낱말이 어떻게 펄떡일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녀의 문장, 낱말은 자신의 구멍 난 생과 생채기 난 이웃의 삶을 옮겼다. 비문학적 서적들에서 만난다면 느낄 수 없는 감이 그녀의 책에서는 고유하게 살아났다. 여러 번의 만남(주관적인 만남)으로 그녀가 주로 쓰는 말에 꽤 친숙해졌다. 이번 책은 지나간 여러 책들을 다 모아 업그레이드한 것 같다. 이웃을 향해 품이 넓어진 방향성이 뚜렷해졌다. 거기에 보너스로 감칠맛 나는 문장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그녀의 문장은 꽤 익숙한데도 허투루 읽을 수 없다. 어제도 한 번에 다 읽지 못해 자정을 넘기면서 매달렸다. 나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이를 모른척할 만큼 헤어 나오기 싫었다. 그녀와의 조우가 아쉽고 아까워 친구와 오래도록 이야기하고도 나머지는 통화하자고 매달리는 것처럼 그러했다. 작가의 문장의 덫은 매우 조밀하며 생각은 두꺼워 진솔함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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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로 먹고사는 이력이 사뭇 남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관련학과를 나와 아이들을 가르치며 머물러있던 나에게 그녀의 문장은 매섭게 몰아세웠다.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어보는 듯 생생하게 다가왔다. 누군가 물려준 옷을 입은 듯 나의 시간은 바투 당겨 입어도 헐겁고 어긋나 있음을 깨달았다. 시인 이상이 말한바대로 겨드랑이가 간지럽다가 날개가 돋아나듯 관습이라는 불쾌감에서 날개가 뚫고 나오기를 바라게 되었다. 오래 입고 있던 남의 옷을 벗고 싶어 졌다. 나를 성장하게 한 생의 과정 또한 무한 감사하지만, 아직 입지 못한 딱 맞는 옷을 걸치고 싶어 졌다.

     

딱 맞는 나의 옷을 찾아 헤매는 것이 나의 글쓰기의 동력이다. 결론을 찾는 것이 아니라 헤매는 것이 나를 쓰게 만든다고 정의 내리고 싶다.


글쓰기로 남은 생을 달려보리라 결심한 것은 그녀 때문이다. 지금 아니면 평생 열지 못할 무거운 문을 억지로 열었다. 포기하려던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마다 나의 창에 날아와 부딪힐 듯 그림자를 던져주고 가던 새들의 환기가 나의 루틴이 되었다.


그녀의 10년 변방의(나의 짧은 해석이다) 글쓰기 노동이 이제 결실을 맺어 가속도를 내기 시작하듯 나도 이제 출발지점에서 한 발을 뗐다. 가속도가 나려면 일단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이 나에게 밤의 가로등처럼 우뚝 서서 밝게 빛나고 있다. 혼자 헤매지 않겠다고 좋아서 발을 동동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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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가오는 말들-을 읽으면서

  

이성애자, 여성, 주부, 워킹맘, 글쓰기 선생님이면서 글 노동자였던 작가의 다채로운 삶의 소리에 공감했다.  특히 여성으로서 구조적 고정관념에 정면 대응하는 모습에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작가의 사유에 모두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구조적인 문제로 강요되는 규범이나 제한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여성이라면 봉기를 일으킬 만한 선구자적 발언도 여기저기 포착된다. 육아가 힘들어도 모성애라는 절대기준으로 죄책감을 안겨주는 사회 통념 앞에 과감히 돌을 던지고 일어나야만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주로 쓰는 여러 단어 중 억압, 폭력이라는 단어가 낯설다. 초 긍정의 시각으로 해석하며 살아내려던 나의 입장에서 조금 과격해 보이기도 했으나, 실제의 폭력을 경험한 자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하기 위한 적합한 장치가 아닐까 한다.

     

어젯밤, 이 책을 느리게 읽었다. 필요에 따라 속독을 하는 나를 책상머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저자의 신간, 방향과 색이 그대로 묻어나면서 더 깊고 진하게 나에게 다가오는 말이 되어 밤새 잠을 설쳤다.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잘 맞는 책의 구절을 인용한 것, 그 책을 소개한 것이 이 책의 킬링 포인트이기도 하다.





나의 다짐과 적용


그녀가 10년 이상 글 쓰는 노동자로 건져 올린 말, 사람들의 생의 소리를 내가 다시 건져 올려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그녀의 따라쟁이가 될 것이다. 브런치를 18년 12월 중순부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지만 따로 글쟁이의 삶을 산 적이 없다. 기고 한번 한 적이 없다. 그저 시를 따라다니며 주워 담는 수준으로 2년을 살았다. 그게 다였다.

     

3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글 쓰는 노동자의 삶을 꿈꾸고 있다. 제대로 쓰고 싶고 내밀한 삶을 걸러 담백하게 제공하고 싶다. 그래서 오전에는 성인반 강의, 오후에는 아이들 강의, 저녁과 밤에는 글쓰기 위해 작업실을 시작했다. 꿈꾸는 글 공방이라는 이름이다. 여기서 나는 그녀가 먼저 건져 올린 사유들, 그리고 그것을 담는 깔맞춤 문장을 따라 쓰고 연습해볼 작정이다. 먼저 걸어간 선배 노동자들을 따라 함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 액셀을 밟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늦게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 방향에 일부 동의하며 공감한다는 것이다. 본격 글쓰기 3개월 차인 신입 노동자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저자가 언젠가 나를 알아볼 날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나의 색깔에 대해 일침이나 칭찬 한마디 남겨줄 날을 과감히 기다리며 부지런히 사상과 사상의 그릇을 닦는데 몰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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