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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Aug 03. 2019

언니의 서평 <왜 엄하게 가르치지...>

왜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가

공적 장소에서 입이 떡 벌어지는 상황을 목격했다. 노 키즈존이 아니었던 장소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이들 여럿이 조용한 실내를 누비고 다니는데, 독서에 매진하던 성인 여럿이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찌푸리는 어이없는 상황. 아이의 엄마 중 한 명이 아이를 멀리서 보고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혼난다고 했다. 과연 들어라고 하는 소리인지 옆사람들에게 민망스러워서 그러는지. 그리고 이런 상황은 반복되었다.


오랜만에 만났는지 엄마들의 얼굴은 밝고 웃음소리가 천정까지 차올랐다. 아이나 엄마나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 닮아 보였다. 아이들은 실내를 가르며 뛰며 소리를 질렀고 가끔 아이 몇의 괴성에 엄마들은 웃음기를 머금고 언성을 높였다.  "자꾸 그러면 여기 못 있어" 아이는 엄마의 말을 반대로 듣는 듯 계속 부산스러웠다. 조금 후 더 시끄러워지자 엄마 한 명이 아이들 뒤통수를 향해 "너 혼나야겠다"라고 흘리듯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엄중하지 않았다.


휙 돌아보는 아이 한 명. 말끔하게 생겨 어린이 모델 즘 할 것 같은 남자애가 그녀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눈싸움 중인 듯 아이는 더 날카로운 눈빛과 어깨 들썩임으로 티가나 게 화를 냈다.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이들은 이 상황의 뒷이야기를 정확하게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아이는 30여 초 엄마와 눈빛을 교환하는 듯했고 엄마는 곧 앉은자리에서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아이는 더 심하게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아이를 자중시킬 다음 단계의 묘수가 필요했는지 그녀는 검지를 세워 흔들며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애교의 윙크까지 날렸다. 아이는 화가 조금 가라앉았는지 혀를 날름 내밀고 다시 친구들에게 달려가 뛰고 소리 지르고 웃기를 반복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공간을 채우는 과격한 백색소음? 때문이 아니었다. 엄하게 통제하지 않고 자신의 규제를 번복하며 잘못한 아이에게 빌며 사과하는 그녀의 교육방식에 분노가 치밀었다. 조금 더 머물렀다면 내가 나설 것 같아 쓴소리를 삼키며 자리를 피했다. 주객전도, 안하무인, 금지옥엽, 호가호위 등의 학창 시절 외운 사자성어 몇 개가 튀어나왔다. 사자성어라도 쏟아내자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공감, 경청이 육아의 트렌드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프랑스 육아가 한동안 이목을 끌었다. 교육방송에 권위 있는 여성박사님이 일관성 있는 태도로 선을 분명히 하는 태도를 자주 언급했다. 그 조언은 전투 육아 중인 부모들에게 좋은 기준이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런 일관성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왜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가]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얇은 분량이라 손쉽겠다는 생각과 별 내용일까 반신반의했다. 두께로 내용을 가늠한 게 섣불렀음을 금세 알게 되었다.

-엄하게 가르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는 아직 성숙한 존재가 아니다, 절대로 아이에게 지지 마라, 권위 없는 어른이 아이를 아프게 한다. [1부 왜 다시 엄한 교육인가?]라는 목차의 하부 목록이다. 목차의 상세 제목만 봐도 저자가 하려는 말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을 믿어주고 자율성을 주는 교육의 문제점을 파헤친다. 아이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규율로 제재를 가하지 않는 시대 분위기에 엄하게 교육하기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에 백 프로 공감한다.


2부에서는 아이의 감정을 읽어준다고 입씨름으로 토론하는 부모에게 경고한다. 기본 생활 규칙을 아이의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을 교육의 섣부른 민주화라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박수를 치고 싶었다. 질서 있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말. 질서를 부여하려면 어른의 권위를 먼저 세워야 함이 교육에서 중요한 부분임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규칙을 준수하게 하려면 벌이 필요하다. 벌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알아야 질서를 어길 때 상응하는 벌을 줄 수 있다. 벌을 주는 것을 겁내지 말라는 말을 소리 내어 한번 더 읽어보았다. 저자는 정당한 벌이 아이를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간략하지만 인상적으로 기술한다.


3부에서는 엄하게 가르치는 기술 부분에서 현대의 가족해체를 지적하고 엄한 교육을 공동체에서 함께 실천하자고 손 내민다. 저자는 공동체의 역할과 가정의 가정의 역할을 분리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이 얼마나 일그러졌으면 가정이 그 역할을 하기에 비관적이라고 하는지 알 듯도 하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건강하게 교육해야 하지만 현실이 어렵다. 저출산으로 과잉보호가 늘어났다. 엄한 교육을 할 수 없는 분위기다. 대가족 해체는 기본이고 이혼을 위시한 가족해체라는 문제점이 아이들의 교육을 가정에 맡기기 어렵다고 전제한다. 공동체가 가정에서 했던 양질의 교육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나라 현실과 맞닿아 더 씁쓸하다. 독일사회보다 가정해체가 덜하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에 이 책의 논의를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자녀에게 최선을 다하는데도 뭔가 육아가 힘에 부치는 열성파 부모에게 유익할 것 같다. 엄해야 할 것과 자율성을 허락해야 할 영역을 나누어 일관성의 기준을 제시한다. 부모가 부족해서 자녀가 이상증세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과잉 사랑으로 부모의 권위를 상실하고 아이를 더 높은 자리에 두기 때문에 벌어진 육아 참사를 바로잡을 일침이 들어있다.


공적 장소에서 그녀들과 함께하던 시간, 마침 읽던 책이 이 책인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아이의 상한 감정을 무마시키려 잘못을 넘어가는 그들의 무책임과 무질서에 책장을 덮었다. 밖으로 나온 뒤 이 책을 그녀에게 건네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과 그랬다면 따귀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도 생각보다 자율 방임적 자녀사랑 육아법에 확고할런지 어찌 알겠는가. 그냥 오지랖퍼가 되지 말고 내 아이에게 선명한 기준으로 다시 나아가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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