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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Dec 13. 2018

______ 겨울과 보리차

초보 시인의 생활 에세이


지인들에게 연말을 맞아 미처 주지 못했던 선물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보온보냉 주전자를 샀다. 그 기능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디자인이 예뻐 집집마다 눈요기를 하라는 의미로 나누어 주었다. 피드백이 돌아왔다. 24시간가량 보온이 되는 신박한 선물에 대한 찬사였다. 그에 따라 나의 안목에 대한 점수도 올랐다. 기분이 썩 좋아졌다. 혹시나 모두들 속으로 하찮다고 여기지 않을까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시집 공저 원고를 마감하며 새벽을 달리고 있었다. 갈증을 인식하지 못하고 혀뿌리가 까슬까슬하도록 시를 펼쳐두었다. 늦게 자면 다음날이 무거워지는 나이라 물 한잔을 얼른 먹고 안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1만 원을 아껴 보려고 온수가 안 되는 직수 정수기를 쓴다. 그런데 이 새벽에 온수 기능이 없는 직수 정수기가 처음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일까 잠시 고민했다. 그 몇 분이 귀찮고 시간도 아까워 찬물을 벌컥 마시면서 구수하고 뜨듯한 보리차가 생각났다. 그 보온보냉 주전자를 나도 사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며칠 전 수업이 생각난다. 아이들에게 겨울 이맘때면 꼭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오르는 대로 25개 빙고칸에 채우라고 했다. 아이들이 유독 좋아하는 글쓰기 수업방법이다. 빙고로 게임을 빙자하지만, 생각 주머니를 키우는 훈련과 동시에 생활 어휘력도 기를 수 있어 글의 소재를 찾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이런 쌀쌀한 날씨에 생각나는 음식 중 예상 밖의 음식을 적은 아이가 있었다.


보리차라고 쓴 것을 보고 음식 축에도 끼지 않을 보리차가 뭐 좋다고 적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반 아이의 1/3이 보리차를 적었다는 사실에 더 많이 놀랬다. 적어도 내게는 돈을 들여 사 먹을 음식과 견줄 수 없는 하찮은 음료를 아이들은 추억으로 소환한 것이었다. 보리차에 어떤 기억이 있길래 추억의 음식으로 등극했을까 의문스러웠다.


작은 아이가 "엄마 투명 물 싫어. 난 콩 넣은 물 줘" 곡식을 넣어 끓인 물을 달라고 한다. 어릴 때 보리차라고 알려주어도 도통 노란 물이라 자주 말했다. 나에게 보리차는 형편이 어려워 정수기 물 대신 아이들에게 끓여주었던 부정적 아이콘이었다. 형편이 나아지고 정수기가 들어온 이후부터 겨울이면 아이는 보리차를 내놓으라고 말한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엄마가 싸주던 뜨끈하고 노란 보리차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으면 엄마가 생각난다고 했었다. 아주 어릴 때여서 무얼 알겠냐고 지나쳤다. 저녁이면 엄마가 보리차를 끓일 때 알갱이가 달강달강거리며 고요한 거실의 적막을 깨던 추억을 아이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 무슨 소리가 나서 못 자겠어"라며 고개를 나에게 파묻던 기억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어본다. 맹물이 주는 비릿하며 맹한 기운보다 구수하고 누런 빛깔의 물이 주는 기쁨이 그에게 더 컸으리라.


나에게도 보리차가 부정적 아이콘이기만 하지 않았다. 어릴 때 바닥이 까맣다가 심지어 푸르스름해진 스테인리스 주전자나 몸통 어딘가가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보글보글, 보리차가 끓던 장면을 기억한다. 추위에 언 손발로 뛰어 들어와 구수하게 퍼지는 그 냄새로 온 몸이 간질거리며 풀리던 기억이 있다.


내가 주문했던 업체에 하나를 더 주문했다. 내일부터 보리차를 끓여 보온 주전자에 넣고 하루 종일 구수하고 뜨순 기운을 마시면서 나를 뜨겁게 지탱해주던 시간을 소환하고 싶다. 딸아이도 내가 하찮게 여기던 것을 이미 소중하게 추억하고 있었다. 그 추억이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생성되는 장면이 되길 바라며, **배송으로 내일 당장 도착할 주전자를 종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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