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후기
김 작가가 또 우울해졌다. 가까운 이가 김 작가더러 우울해서 싫다고 했단다.
내가 우울하기도 하지만 항상 우울한 건 아니잖아, 나는 우울하기도 하지만 유쾌하기도 하잖아. 나는 사람들에게 뭔가 해주는 걸 좋아하기도 하잖아. 근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서로 그 정도는 감당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그렇게 자신을 잘도 알면서 그녀를 잘 모르거나 더 이상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듣고 우울해하다니. 바보, 김 작가...
사실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우울하다. 그러니 그녀의 우울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자주 우울하다. 아니, 그녀는 우울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게 그녀의 정체성인 것을. 정세랑의 글에서처럼 우울은 그녀의 지성을 낳고 예술적 감각을 낳고 위트를 낳는다. 무엇보다 밤마다 넘실넘실 타고 올라오는 우울과 싸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아침이면 가족을 부양하는 생존 욕구로 또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 그녀가 업싸이클링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누군가 버린 것들에 미련을 덕지덕지 쌓는다. 동시에 전사처럼 가차 없이 부숴버린다. 뚝딱뚝딱 근육과 관절을 바쳐서 갈고 덧씌워서 새로운 것, 세상에 없던 것, 처음 보는 것을 탄생시킨다.
그녀의 예술가적 기질은 감자나 비누곽 같은 걸로 시를 쓰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녀가 말하면 그냥 그대로 노래가 되고 시가 된다. 누구라도 불러서 함께 그림을 그리는데, 사람이다 사람이다, 되뇌면 사람이 되는 거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만 그게 또 신비한 기적을 낳아 똥 손을 금손으로 만들어낸다. 하루에도 열두 개씩 명언을 남기는 그녀다.
그래서 김 작가는 김 작가다. 다른 무엇을 더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삶 자체가 작품 활동이니까.
그런 그녀이기에 때론 지치고 소진될지라도 감당해줘야 할 것들을 기꺼이 감당하며 모임을 함께 한다. 감당 못하는 것들은 저리 물렀거라.
그런 구름 본 적이 있나? 솜사탕 기계에 설탕을 넣고 딱 세 바퀴만 돌렸을 때 성기게 엉긴 솜사탕, 바로 그런 구름. 송송송, 구름이 솜사탕보다 성기게, 깃털보다 가볍게, 봄바람이 실체가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 같은 모습으로 떠있는 거. 비행기에서 구름과 같은 시선의 높이에서 구름을 보면, 세상에 구름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우리 구름이는 그렇다. 구름이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싶게 가볍고 부드럽고 소중하게 우리 곁에서 웃고 있다.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화를 낸 이야기를 가끔 한다. 하지만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데,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녀가 살아온 과정이나 삶의 모양, 그 어느 것도 가늠되지 않는다. 뭉게뭉게 떠있지만 가까이 가면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나의 세포와는 전혀 다른 것들로 구성된 것 같다. 그 다름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녀가 나를 구름처럼 감싸 안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져오는 책, 그림, 음악은 언제나 내 목록에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것들이다. 편견이 많고 낯을 가리는 내가 구름이를 향해 선뜻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구름과 같기 때문이다.
구름이 요즘 힘들어한다. 어둡고 외로운 것들이 구름에 끼어들었나 보다. 어느 날 참을 수 없이 무거워지면 한바탕 비를 쏟아낼 것이다. 그러면 구름은 다시 바람 따라 하늘을 떠다닐 것이다.
하이디가 하이디인 것을 이번에야 알았다. 하이디는 그동안 바쁜 와중에 모임에 잠시 들렀기 때문에 항상 조금 지쳐있었고 한발 물러나 있었다. 코로나를 맞아(?) 한동안 쉬는 시간을 가졌다는 하이디를 만나면서 하이디가 얼마나 하이디스러운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요들송을 부르도록 높았다. 대화는 흥미 높은 스위스 사람들처럼 구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
하이디는 어떤 생각을 떠올릴 때 문자보다 이미지로 떠올리는, 문자로 먼저 이해하는 나와 다른 종의 사람이다. 하이디의 드로잉과 글을 보면 그녀의 뇌는 연필로 스케치되어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음악, 우쿨렐레를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그녀의 손가락에는 음표가 없다. 우쿨렐레는 그저 그녀의 덧니와 같이 웃음으로 연주되는 듯하다.
나는 그녀로부터 우쿨렐레를 배운 적이 있다. 그녀의 우쿨렐레 소리가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아 결국 포기해야 했다. 그녀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웃음과 같은 음악이 내게는 코드 변환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내게 악기는 계산기와 같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빼고 무엇을 곱해야 하는지, 그 버튼을 눌러야 결과치가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는 버튼이 없다. 그저 몸과 악기가 하나가 되니까. 악기는 리듬을 타기 위한 거니까. 하이디에게 수강생이던 나는 빨리 잊히고 싶다. 모임 동료로서만 기억되고 싶다.
나무는 나와 매주 시 쓰기를 한 적이 있다. 그녀의 시는 항상 한 편의 동화였다. 그녀의 상상력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다. 하지만 그녀는 탈고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그녀의 시를 탐냈다. 내가 조금만 다듬어주면 안 될까, 하는 욕심이 수시로 올라왔다. 가끔 그녀의 허락으로 다듬다 보면 그녀의 시가 아니게 되었다. 그녀의 시는 그냥 생긴 그대로 여야 한다.
그녀는 엉덩이만 붙이면 글이 나온다, 고 말해서 우리를 놀라게 한 적이 있는데(물론 우리도 엉덩이를 붙이고 컴퓨터를 째려보는 거부터 한다. 그렇다고 글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저 필수조건일 뿐), 그동안 읽은 책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사차원적이어서 생각지 못한 순간에 여기저기로 자유롭게 튄다. 모임 중에도 위트 있는 말로 우리를 순식간에 이곳저곳으로 끌고 가 버린다. 하지만 책 이야기를 시작하면 목소리가 낮아진다. 꾹꾹 눌러서 말한다. 누구보다 진지하다.
우리는 그녀의 글만큼 그녀의 그림을 아끼는데, 그녀의 그림은 새파랗게 밀어낸 어린 승녀의 머리통 같다. 파르라니 푸르다. 초록 그늘을 품은 나무처럼 짙다. 그녀의 그림은 글보다 더 그녀를 드러내 준다. 항상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서 어떻게 저렇게 진하고 곧은 선이 나올 수 있을까 볼 때마다 놀랍다.
그 누구보다 그녀가 꼭 드로잉 에세이를 써주기를 학수고대한다. 제발!
키키, 그녀에게 ‘나의 그녀’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을까. 비록 그녀 시리즈가 나에게 의미 있는 이들에 대한 헌정 글이기는 해도 키키에게는 나의 라는 소유격을 쓰는 것부터 그녀 고유의 성질을 해치는 것 같다. 그만큼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창작욕에 불타고 있다. ‘여전히’라고 하는 이유는 세 아이의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항상 아쉽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쉬운 상태지만 안달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지나치게 욕심내지 않는다. 부족함조차 너그러이 떠안고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나는 그녀가 그림책을 내고 출판 기념회를 하는 걸 보고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나를 그림책 작가라는 길로 인도해준 사람이다.
그녀는 상대의 장점을 끊임없이 칭찬하고 극대화해서 자신감이 생기게 하는 데 재주가 있다. 누구라도 그녀 앞에 서면 자신의 장점을 찾을 수 있고 진심에서 우러난 존경을 받을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따뜻한 그녀는 모두를 감싸 안는다. 하지만 그 안에 그녀는 없다. 그녀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디에나 있어서 그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떠다닌다. 가끔은 그것이 당황스러워 그녀를 곁에 매어놓으려 했지만 그녀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언제나 웃으며 둥둥 떠다닌다. 공기처럼.
그래, 그녀가 공기라면 좋겠다. 그녀가 공기로 떠다니며 무한 긍정 에너지를 발산해준다면 굳이 내 곁에 앉히려고 애쓸 필요 없겠지.
푸딩은 유일한 남자고 미혼이다. 우리 모임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푸딩은 그림을 그린다. 키키의 그림책에 그림을 그려주면서 인연이 되었다. 전문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의아했다.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전문가가 우리 모임에 만족이 될까 싶었다. 그런데 이런 모임이 필요했단다. 특별히 마감에 쫓기지 않으면 열심히 온다. 전문가들도 모임이 필요하구나, 처음 알았다.
푸딩은 그림체가 다양하다. 한 사람의 그림이 맞나 싶을 정도다. 상상력도 예측할 수 없이 폭넓다. 그래서 오히려 수습이 안 되는 측면도 있다. 우리는 푸딩의 그림을 보며 신나게 떠든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크게 오지랖이 없는 편인 우리들이 푸딩에게는 유난히 오지랖을 떨며 이런저런 조언도 한다. 그림을 보며 쏟아져 나오는 아이디어를 각자의 포대에 담아 준달까. 쓰고 보니 당연히 도움이 되겠다. 기쁘다. 푸딩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다. 뭐든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 존재.
그리고,
신입 권 작가가 있다. 신입이라기엔 벌써 1년이 넘었지만 새로운 멤버가 더 들어오지 않는 한 신입이다. 권 작가는 아직 가만히 우리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가 힐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언젠가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힐링하게 될 것을 안다.
그녀는 전통문화를 외국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굿즈 만드는 일이다.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선도적인 일이라 그것만으로도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녀가 만든 문양으로 곧 그림책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창작자들이다. 항상 무언가를 쓰고 그리고 만들고 노래한다. 그림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여서 3년간 모임을 유지했다. 그리고 몇 년을 쉬었다 다시 만났다. 책과 그림과 영화 등을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기로 했지만 그건 그저 핑계다. 이런 멤버가 다시없음을 알기 때문에 서로를 놓지 못하는 거다. 서로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만난다.
샘이 많은 김 작가는 언제나 다른 이들을 부러워한다. 모든 이야기를 부러워, 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나도 부럽지만 표시 내지 않고 가만히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부러움, 질투, 시샘이 없다. 아낌없이 격려하고 손뼉 쳐준다. 지나치게 각이 없어서 문제라고 할 만큼 상대의 성장과 발전을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스스로 꽤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다가 이들 앞에 서면 절로 작아진다.
성마르게 덤벼드는 나와 달리 이들은 항상 여유롭다. 본업도 있고 주부 노릇도 한참일 이들인데 언제나 푸근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도 어느 순간 보면 저만치 앞서 나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자유롭게 하는 걸까.
동시에 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니까 여기 속하는 거겠지,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그러니 이 모임은 앞으로도 쭈욱 이어지기를.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우리는 딱 한번, <쫌>이라는 문집을 만든 적이 있다). 가끔 우리에게는 모임이 있지, 라는 생각만으로 돌아갈 고향이 있는 탕아처럼 든든하다. 친정 있는 여인네처럼 미더웁다.
- 천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