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원고 | by 나무
모자와 물고기
#1
냇가에 조그마한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어요.
물고기는 돌 틈 사이를 가만히 헤엄쳐 돌아다녔어요.
이따금씩 나뭇잎이 떠내려 올 뿐, 냇가는 항상 조용했어요.
물고기에게 냇가에서 헤엄이나 치고 노는 게 몹시 지루했어요.
#2
‘어, 저게 뭐지?’
모자 하나가 둥둥 떠내려 왔어요.
가운데가 볼록 솟아 있고 챙이 넓은 모자였어요.
미끄러지듯 물 위를 흘러내리다가 턱 하고, 돌에 걸려 움직이지 않았어요.
돌 틈에 숨어 서 보고 있던 물고기는 가만가만 지느러미를 움직여 다가갔어요.
모자를 한 바퀴 빙 둘러본 물고기가 모자 안으로 쓰윽 들어갔어요.
#3
모자 안은 캄캄했지만 아늑했어요.
볼록 솟은 곳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어요.
구멍으로 햇빛이 들어와 물 위에 동그란 점을 만들었어요.
지느러미를 흔들 때마다 동그란 점이 무지갯빛으로 빛났어요.
물고기는 빛을 뚫고 헤엄을 쳤어요.
“멋진 모자야!”
#4
그때였어요.
갑자기 바람이 휙 하고, 불어왔어요.
모자가 뒤집히는 바람에 물고기는 모자에 움푹한 곳으로 미끄러져 떨어졌어요.
물이 반쯤 고인 모자에 물고기가 갇히고 말았어요.
“아, 얏!”
#5
모자가 물을 따라 흘러갔어요. 물고기도 함께 흘러갔어요.
나뭇잎 하나가 모자 옆으로 톡 떨어집니다.
나뭇잎과 모자가 경주를 시작했어요.
물고기는 자연스레 모자를 응원하며 덩달아 꼬리를 쳤어요.
모자가 나뭇잎을 앞질렀어요.
“야호 신난다!”
#6
하늘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있고, 모자에 안이 햇살로 가득 찼어요.
해가 따가울 때면 구름이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어요.
넓은 강물 위에 구름이 만든 물그림자들이 둥둥 떠다녔어요.
조그만 냇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넓은 강과 아름다운 풍경에 물고기는 넋을 잃었어요.
모자만한 파란 하늘에서 물고기는 유유히 헤엄을 쳤어요.
#7
메기 할아버지가 물고기에게 다가왔어요.
“물고기야, 모자에 갇혔구나. 내가 꺼내줄까?”
“아니요. 전 모자에서 사는 게 좋아요. 모험을 하는 중이에요.”
“물고기는 물에 살아야지.”
'모자가 없으니까 괜히 심통을 부리는 거야.'
물고기는 메기 할아버지 얘기에 콧방귀를 뀌었어요.
#8
지다가던 붕어 떼가 모자 곁으로 우르르 몰려왔어요.
“우와, 멋진 배다!”
붕어 떼 무리 중 하나가 말했어요.
“물고기야, 너 꼭 선장님 같아.”
붕어들이 앞을 다투어 물고기를 구경했어요.
물고기는 우쭐해져서 꼬리에 힘을 주고 뽐내듯 지느러미를 세차게 저었어요.
붕어들이 모자에 태워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물고기는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어요.
붕어떼가 들어오면 좁아서 살수가 없을 테니까요.
#9
그때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왜가리다, 피해!”
붕어들은 순식간에 흩어졌어요.
하늘을 쳐다보니 왜가리가 물 위 가까이로 날며 먹이를 찾아 휘휘 돌고 있었어요.
검은 털이 길게 난 눈으로 물을 째려보고 있었어요.
긴 부리가 날카롭게 반짝였어요.
모자에 있는 물고기만 물위에 둥둥 떠 있었어요.
물고기는 그제야 냇가가 생각났어요.
돌이 많아서 그 틈에 숨으면 아무도 찾지 못했거든요.
물고기는 무서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10
왜가리가 모자 가까이로 날아왔어요.
물고기는 눈을 꼭 감고 벌벌 떨었어요.
곧 텀벙, 소리가 났고 통통한 붕어를 물고 왜가리가 멀어졌어요.
물고기는 크게 숨을 내쉬었어요.
하지만 몸은 여전히 부르르 떨렸어요.
갑자기 물고기는 모자 안에 있다는 게 그물에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무서워졌어요.
#11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물고기가 크게 외쳤지만 물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물고기는 있는 힘을 다해 꼬리로 뜀을 뛰었지만 소용없었어요.
#12
강 한 가운데 가지가 잘린 나무가 우뚝 서 있었어요.
모자가 곧 나무에 부딪힐 것 같았어요.
물고기는 꽝하고 부딪히는 순간, 물을 박차고 공중에 붕 떴어요.
살았다, 생각했지만 떨어진 곳은 모자 안이었어요.
#13
모자는 물을 따라 계속 흘러내려갔어요.
하늘에 먹장구름이 하나 둘 모여들었어요.
빗방울이 하나 둘 모자 안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어요.
우르르 쾅쾅 천둥 번개가 치고 물살이 거세졌어요.
물고기는 하늘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더 이상 헤엄칠 기운도 없어서 모자 안에서 이리 저리 치이고 부딪혔어요.
비늘이 벗겨지고 살갗이 뜯어졌어요.
#14
한참 후에야 비가 그쳤어요.
강물이 잔잔해지자 불어난 물이 뿌옇게 흐려졌어요.
물고기는다친 몸을 가만히 들여다봤어요.
모자 안으로 슬쩍 슬쩍 어둠이 모여들고 있었어요.
냇가가 몹시 그리웠어요.
가만히 지느러미를 흔들면서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기고 있던 시간들이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졌어요.
어느 새 하늘에는 달이 뜨고, 별이 초롱초롱 빛났어요.
달빛이 모자에 한 가득 들어왔어요.
물고기는 물에 비친 달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달빛조각이 흔들렸어요.
“냇가로 가고 싶어…….”
물고기는 고개를 떨구었어요.
#15
다음 날 아침, 해가 쨍하고 떴습니다.
‘여기는 어디지?’
주변을 돌아보니 강 옆으로 집들이 보였어요.
색색이 아름다운 지붕 위로 산이 보였어요.
빗물로 씻긴 산들이 무척 푸르렀어요.
깊은 강처럼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었어요.
전에 보던 아름다운 하늘이었지만 물고기는 마음이 괴롭기만 했어요.
강둑에 한 아이가 강아지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세차게 달려갔어요.
아이는 숨이 차게 뛰면서도 깔깔깔 웃었어요.
왈왈 짖으며 따라오는 강아지도 풀밭 위를 자유롭게 달렸어요.
아이와 강아지가 뛰어가면서 풀잎에 물방울이 튀어 올라 눈부시게 빛났어요.
물고기는 멀어지는 아이와 강아지를 물끄러미 바라봤어요.
#16
저 멀리 강가에서 왜가리가 자맥질을 하고 있었어요.
“이젠 나는 죽는구나.”
왜가리 눈과 마주친 물고기는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았어요.
“어허, 멀쩡한 모자를 누가 버렸담.”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할아버지가 모자를 물에 휘휘 흔들어 머리에 썼어요.
엉겁결에 모자에서 빠져나온 물고기는 얼른 깊은 물로 도망쳤어요.
크게 숨을 몰아쉬고 쿵쾅거리는 소리가 가라앉을 때였어요.
불현 듯 머릿속에 모자와 쌩쌩 물위를 달리던 때가 생각났어요.
어쩐지 물고기는 모자가 그리워집니다.
물가로 가만히 올라온 물고기는 빼꼼히 물 위로 얼굴을 내밀었어요.
할아버지가 쓴 모자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어요.
모자가 하늘에 붕붕 떠 걸어갑니다.
물고기는 강물 위로 모자가 만드는 둥그런 물그림자를 밟으며 헤엄을 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