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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창작모임 쫌 Apr 06. 2023

봄비 내리는 날에는 봄비 노래를

아파트에서 즐기는 사계 ㅣ by 천둥

창밖으로 보이는 느티나무 가지가 그새 더 짙어졌다. 갓난아이가 하루하루 다른 것처럼 일주일 전만 해도 아기 손마냥 여리여리하던 잎이 제법 색과 꼴을 갖추어가는 걸 보는 맛이 쏠쏠하다.

봄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봄비 노래를 들었다. 봄비라는 제목의 모든 곡들을 다 듣는 식이다. 아무래도 장범준의 봄비가 제일 먼저 나오고 하현우의 복면가왕버전 봄비, 그리고 신중현의 봄비가 여러 버전으로 나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전은 박인수 씨다. 독특한 음색 때문에 처음에는 웃었지만 그만의 매력에 빠져 반복해서 들어도 또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은하의 봄비. 여러 앨범이 있지만 맨 처음 녹음한 스무 살 무렵의 봄비가 가장 가슴을 울린다.   



3월 들어서 등산을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 식장산에 오른다. 식장산이라고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가장 가깝고 익숙하니까. 익숙하면 귀찮다는 생각이 조금 덜하다. 역시 루틴이 제일 지키기가 쉽다.

산에 다니면서 좋은 것은 아직도 봄이 오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 한 달 동안 네다섯 번이나 오로지 봄을 보았다. 아직 싹이 나기도 전이지만 봄바람을 느끼기 시작해서 산 저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연한 분홍, 버드나무 끝에 달린 연두, 그리고 드디어 초록물이 올라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 보고 있다.   

그러고도 아직 봄은 진행형이어서 봄비가 내리는 중이다. 이번 봄비가 그치고 나면 봄은 더 성큼성큼 다가오겠지. 그것도 나는 놓치지 않고 다 봐야지.         

    


봄은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작점이 되어주기도 한다. 나는 1월이나 새해보다 풍경이 완연히 달라지는 봄이 되어서야 해가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편이다. 봄을 기다린 만큼 ‘완전히 달라진 나’를 보여주어야 한다. 대단할 필요는 없다.  

일단 이불. 이 비가 그치면 이불 빨래를 할 거다. 아직 겨울이불을 덮고 자는데 이제는 빨아 넣고 봄 이불을 꺼내야겠다. 이불빨래하기에 봄만큼 좋은 계절은 없다. 건조해서 빨리 마르고 걷고 나면 봄볕 냄새가 가득하니까. 토퍼까지 커버를 바꾸려면 힘 좀 써야 한다. 온 가족 행사가 되겠다. 하는 김에 대청소까지.      

이불 빨래가 끝나고 나면 옷 정리가 기다린다. 겨울 패딩은 집어넣었지만 아직 목폴라는 그대로 있다. 겨울옷 중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넣을 것은 넣고, 봄옷을 꺼내 봄볕에 말려야지. 습기제거를 위해 신문지를 중간중간 넣어서 보관했지만 햇빛 한번 보는 것과 안 보는 것은 천지차이. 옷 정리는 조용한 날 혼자 후딱 해치울 거다. 여럿이 같이 하면 말만 많고 정신없다. 그 정도만 해도 완전히 달라져 보일 거다.         


전국에 동시다발로 산불이 났다고 한다. 지난밤 우리 동네에도 산불이 났다. 내가 다니는 곳은 아니지만 인근의 아파트 주민들까지 대피를 했단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무서운 일이다.

이 비가 오래오래 내려서 땅을 촉촉하게 해 주면 좋겠다. 산불이 완전히 꺼지고, 마른 잎도 한동안 젖어있게. 그동안 미세먼지도 심했는데 그것들도 싹 쓸어내려가 주면 좋겠다.       



산에 다니면 아파트 안 산책은 심심할 거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비교가 되어서 다른 만족감을 느낀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면 편안한 느낌. 산도 좋지만 역시 산책이 좋다. 밤에 걸어도 무섭지 않은 안전감과 안정감이 있다.      


요즘은 낮에 산책하는 일이 잦은데,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이 나와서 논다. 옆에 가만히 앉아 아이들의 말을 수집하기도 하는데, 아이들의 특이한 행동이나 옷, 가방 등을 유심히 본다. 동화책을 쓰려고 아이들의 말투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치, 그치? 어? 어? 라든지, 나돈데, 싫은데, 할 건데, 라든지. 아이마다 특유의 어투가 있다.

얼마 전에는 구멍이 난 땅에 막대기가 박혀있는 것을 보았다. 주변을 살펴봐도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 걸 보면 딱히 무엇이 보고 쑤신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아이는 거기서 무엇을 했을까. 혼자였을까, 둘이나 셋이었을까. 혼자였다면, 이라고 상상하는 순간 아이의 심드렁한 표정이 그려진다. 하지만 쑤시는 동안 조금씩 뭔가 열의가 올라오지 않았을까. 구멍을 판다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므로, 다 파고 난 다음 아이는 이전보다는 조금 괜찮아진 마음으로 돌아서지 않았을까. 둘이나 셋이었다면, 심심한 마음에 시작하기는 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까, 비켜 봐 내가 해볼게, 하면서 돌아가면서 쑤시다가 결국 열적은 표정으로 막대기를 내동댕이쳤을 거다. 그렇다면, 구멍 안에 막대기가 있는 걸로 보아 혼자인 아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혼자 그러고 있다가 멀리서 친구가 부르자 얼른 손을 놓고 달려간 거면 좋겠다.



올해 첫 라일락을 보았다. 아직 벚꽃이 채 지지 않았고 이제야 민들레와 제비꽃이 한창인데 벌써 라일락이라니. 어리둥절한 일이긴 하지만 반갑기도 했다. 라일락 향을 맡지 못한다는 것이 이토록 아쉬울 수가(아직 코로나로 인한 후각이 회복되지 않았다. ㅠㅠㅠ)      


참, 며칠 전 인근에서 우람한 벚꽃나무 공원을 발견했다. 왜 여태 몰랐을까. 후미진 곳이긴 했지만 너무 근사한 공원인데 이제야 발견하다니. 얼른 김밥을 싸들고 남편과 나들이를 갔다. 처음 발견한 날 벚꽃이 절정이었고 남편과 갔을 때는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던 날이었다. 절정의 벚꽃을 혼자 보려니 너무 아쉬웠는데 남편과 그것을 나누고 나니 마음이 뿌듯했다. 사람이란 아주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생각되다가도 이럴 때면 금세 인류애를 믿게 된다. 좋은 것을 함께 보고 싶은 마음, 이건 어떤 본능인 걸까.   



우람한 벚꽃을 보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싹둑 잘라버린 나무가 눈에 띄었다. 꺾인 봄. 잘려나간 봄. 다시 인류애 싹둑. 그럼에도 피는 봄이라는 걸 떠올리며 봄에 지지 않을 생명력을 끌어올린다. 아자! 


동요 봄비가 흘러나오면서 조금 지겨워지려 하는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가 흘러나온다. 

캬, 좋구나. 봄비 내리는 날은 봄비 노래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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