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전동성당, 경기전 그리고 칵테일과 몰트 위스키
드디어 12일 차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너무나 유명한 도시라서 다들 잘 알고 계실, 그래서 방문했을 때 많은 분들에게 맛집이나 술집 추천을 받았던 도시인 전주로 갑니다. 물론 저도 처음 가보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추억이 있는 도시라 제주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들르고 싶었던 곳입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아침형 인간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아주 피곤한 날이 아니면 7시 이전에 기상한다. 그렇게 주어진 '아침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주로 침대에서 뒹구는 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숙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서둘러 짐을 싸버렸다. 그러면서 변산반도 쪽의 물때를 알아보니 오전 내내 간조. 바다가 영 예쁘지 않을 타이밍이다. 그렇다면 바다를 구경하는 것보다는 빠르게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전주를 향해 달렸다. 아, 하지만 혹시나 싶어 바닷가를 보며 달릴 수 있는 길로 좀 돌아서 달리긴 했다. 내륙(?)으로 들어가기 전 코에 바닷바람을 더 넣고 싶었나 보다.
몇 년 전일까?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가 급 비빔밥이 먹고 싶다고 해서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에 내려왔던 적이 있었다. 꽤 유명한 가게에서 먹었는데 엄청 별로였던 적이 있었다. 당시의 메모를 보면 '콩나물 국이 제일 맛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으니 전주비빔밥이라는 것에 큰 실망을 했었던 기억이다.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고, 전주비빔밥에 대한 이미지를 좀 개선해보고자 엄선해서 찾아간 집이 바로 한국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점심시간보다는 좀 이른 시간이다. 부지런히 움직인 보람이 있다. 그늘막이 있는 자리에, 게다가 후진 주차를 한 방에 성공시키고 나니 기분도 좋아진다.
외부에서 간판을 보고 '오, 뭔가 포스가 느껴지는 군'이라고 생각하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데... 아, 뭔가 느낌이 쎄하다.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설마, 설마 그때 그 집인가?
(지금은 메뉴판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전주비빔밥을 시켜서 한 상 받고 나니... 아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일까. 게다가 콩나물국...
콩나물국을 먼저 먹어보고, 밥을 잘 비벼서 한 숟갈 떠먹어 보니... 아, 잘 모르겠다. 콩나물국이 그다지 맛있지 않았고 비빔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풍경과 상차림에서 오는 익숙한 기시감과 기억과는 다른 맛 때문에 정확하게 '그때 그 집'인지는 판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역시 비빔밥은 비빔밥이구나. 가게가 달라져도 큰 편차가 없는 비슷한 맛이구나'하는 느낌. 그래도 그 '적은' 편차 안에서 괜찮은 편에 속하는 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혹시 예전에 와서 먹고 실망했던 바로 그 집이라면 그땐 왜 이걸 먹고 실망했을까? 생각을 해보니 당시에 기대가 너무 컸거나 지금은 입맛이 변한 것이 이유일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입맛이 매우 까다로운 척 하지만 사실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다.
밥을 먹고 나서 숙소에 전화를 해보니 두 시부터 체크인이긴 하지만 빈 방이 있기 때문에 언제 와도 체크인할 수 있다고 하길래 차를 세워두고 돌아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모텔로 찾아갔다. 트렁크에 있는 아이스 박스를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어제 꽝꽝 얼려둔 냉매가 하루 정도는 버틸 것 같아서 그냥 트렁크에 놔두기로 했다. 가벼운 짐만 들고 숙소에 잠깐 들어갔다가 바로 밖으로 나왔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오~ 검색해보니 전동성당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스타벅스가 있다. 숙소에서 스타벅스까지 걸어가는 길은 번화한 듯하면서도 평일 낮의 한적함이 느껴지는 지방 도시의 중심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차를 버려두고 '걷는 일'의 즐거움을 살짝 느끼면서 스타벅스에 도착. 역시 한옥마을 근처로 오니 한복을 입은 사람들도 보이고 관광객들(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전주 한옥마을 앞의 스타벅스(↗)는 서울에서도 못 가본 '리저브 매장'이었다. 그게 뭔지 들어본 적도 없어서 물어보니 원두도 다른 걸 쓰고 드립 방식도 직접 고를 수 있다고. 사실 '아메리카노'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스타벅스에 가서도 항상 '오늘의 커피'를 마시는데(차갑게 마실 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고 아이스커피), 이런 매장이 많았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커피를 받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더니, 우와~ 창 밖으로 전동 성당이 보인다.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화각을 잘 조절해보니 창틀을 피해서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사람구경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는데, 유난히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화사한 한복을 빌려 입고 돌아다니면서 인생샷을 건지는 게 전주 여행의 새로운 패러다임(?)인가보다.
더운 날씨에 걷느라 흘린 땀을 시원한 커피와 에어컨으로 좀 식힌 다음 본격적으로 산보를 나섰다. 일단 창 밖으로 보이던 전동성당. 처음 전주에 왔을 때 이걸 보고 감동을 받았었다. 그 이후 전주를 찾을 때마다 항상 들르는 곳.
로마네스크 양식의 육중함과 함께 우아함도 느껴지는 건물. 저 버트리스들이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플라잉 버트리스가 되면서 고딕 양식이 되겠... 아, 이런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고. 사람이 엄청 많아서 건물 사진을 찍을 때마다 관광객들이 함께 찍히는데, 다들 어디선가 옷을 빌려 입었나 보다. 특이한 옷을 입은 분들이 많다.
정면의 파사드만 보고 모든 걸 봤다고 할 수 없지. 한 바퀴 빙~ 돌면서 곳곳을 찍어본다. 정면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이렇게 바라보니 전동성당인지 모를 정도네. 저기 어디 유럽에 있는 건물 같은 느낌이다.
이건 성당 맞은편에 있는 부속 건물들. 언제 지어진 것인지 정보는 알 수 없으나, 석조의 기단부와 그 위로 빨간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 구조가 탄탄한 느낌이고, 3x3의 메인 구조체 양 옆에 아치 구조가 도드라지는 발코니가 아름답다. (건축과 출신인 것을 티 내기 위해 현학적인 단어를 별 의미 없이 나열해봤다.)
평일 낮인데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적해 보이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 눈치를 보며 좀 기다렸어야 했다. 어쨌거나 6월의 녹음. 커다란 가로수들.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
전동성당에서 조금만 걸으면 경기전으로 갈 수 있다. 박물관 구경도 하고 (비록 필사본이지만) 태조 이성계의 어진(임금님의 초상화)을 비롯해 조선시대 왕들의 어진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의 왕들이 '전주 이 씨'였다. 그래서 '전주'에 이런 것이 있는 것이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위의 사진에서도 아래의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카메라 아니 핸드폰만 들이대면 여기저기 온통 한복이다. 전부 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래도 사진 분위기를 낼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
전주에 도착했다고 포스팅을 하다 보니 많은 분들이 추천해주신 카페 안아줘(↗). 그거 좀 걸었다고 그새 땀이 꽤 흘렀기에 시원한 걸 좀 마시려고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엔 한옥이지만 들어서면 깔끔하고 세련된 곳.
멋진 스피커와 매킨토시 앰프가 눈길을 끌었다. 왼쪽 스피커 위에 쓰러진 와인잔은 장식품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랬던 것 같다;;;
생과일 쥬스가 유명하다고 들어서 시원하게 핑크 자몽쥬스. 가게에 온통 여성분들. 남자는 나 혼자인 데다가 혼자 온 손님도 나 혼자라서 뭔가 조용히 시원함을 즐기기보다는 후다닥 땀을 식히고(뭔가 아이러니하네;) 나왔다.
카페 안아줘 바로 옆은 바로 베테랑 분식(↗). 점심을 좀 일찍 먹었더니 속이 좀 허해서 들렀다.
원래는 칼국수가 유명한 집이지만 여름 한정으로 콩국수를 하시는데, 아... 이게 예술이다. 일단 비주얼부터가 심상치 않은데, 저 뽀얀 국물. 그러니까 콩국물이 그동안 먹어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진하면서 잡내 없이 깔끔한 느낌. 저 콩물을 따로 주문해서 드시는 분들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콩물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상대적으로 면은 기억이 잘 안 난다. 김치도 깍두기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만큼 콩물이 대단했다. 추천해주신 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추천해주셨는지 너무 잘 알겠다.
배부르게 콩국수를 먹고 나니 일단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 전주천을 따라 걸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이 없어서 좋았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덴 이유가 있었겠지. 더웠다 더웠어.
전주천을 따라 걸어서 숙소 쪽으로 가다 보니 여인숙이 즐비한 골목들이 나온다. 쪽방이라고 하던가? 어쨌든 한옥 마을의 화려함과는 또 다른 도시의 흔적. 도시의 시간은 켜켜이 쌓이면서 세월이 된다.
그리고 혼자서 피식했던 간판. 잊지 않으려고 찍어뒀다. 오성은 과연 칠성의 패러디나 오마쥬였을까? 아니면 당시에는 이런 식의 이름이 유행이었던 걸까? 하지만 저 트레이드 마크는 너무나 칠성스러운데?
작은 골목들을 걸어 숙소까지 돌아왔고, 샤워를 하고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었다.
점심을 일찍 먹었기 때문에 중간에 한 끼를 더 먹었더니 저녁을 먹을 배가 남지 않았다. 아, 입 짧은 사람의 한계. 아쉬움. 오랜만의 산책으로 지친 몸을 좀 눕혔다가 해가 질 때 즈음 본격적인(?) 전주 방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시 숙소를 나섰다.
먼저 들른 곳은 남부시장 청년 몰.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TV 프로에서 이곳의 얘기를 재밌게 봤던 터라 궁금했다. 시들어가는 지역 전통 시장. 그러다 보니 가게들이 모두 빠져서 썰렁해진 2층의 가게들. 거기에 젊은 주인장들이 모여서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고 덕분에 전통 시장까지 활성화됐다는,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곳. 꽤 많은 전통 시장에서 벤치마킹하는 그곳.
청년몰을 잠깐, 아주 잠깐 구경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바로 소개받은 바로 향했다. 바, 차가운 새벽. 까칠하다기보다는 자기 색깔이 확실한 쥔장님이 재밌는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곳이다. 다양한 몰트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쥔장의 취향이 뭔지는 확실히 알 수 있는 수준의 몰트를 가지고 있고, 어디선가 본 것 같지도 않은 다양한 리큐르와 진을 가지고 있는 바. 꽤 마음에 들었던 곳이라 별도의 포스팅으로 방문했던 기록을 남겼다.
바, 차가운 새벽 - 전주 청년몰의 개성 넘치는 칵테일 바
차가운 새벽에서 칵테일을 네 잔 정도 마셨더니 위가 활성화된 걸까? 아니면 콩국수를 먹고 나서 충분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갑자기 배가 출출해져서 뜨끈한 국물을 먹고 싶어 졌다.
그래서 들른 곳이 남부시장 1층에 있는 조점례 남문 피순대. 어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깐 동안 줄을 섰다가 입장했는데, 가게 안에도 사람이 드글드글. 주문했더니 엄청 빠르게 순댓국이 나온다. 국물이 보글보글.
뜨끈한 국물로 속을 든든하게 한 다음 찾은 곳은, 이번 전주 여행의 목적.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전주를 들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로 그 바. 진주도가(↗).
사실 청년몰에 가기 전에 이곳을 먼저 들렀었다. 한 6:30 쯤? 그랬더니 가게 준비하고 계시던 사장님께서 여덟 시에 오픈한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1차와 2차의 순서를 바꿨던 것이다. 뭐, 결국 가장 기대했던 곳을 가장 마지막에 들르게 됐으니, 조용필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건가?
보유하고 있는 몰트의 종류와 양도 상당하고, 칵테일의 수준도 준수하다. 바로 앞서 들렀던 차가운 새벽과는 아예 결이 다른 곳이라 직접적인 비교는 적절하지 않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차가운 새벽의 칵테일은 캐주얼하면서 개성이 넘친다면 진주도가의 칵테일은 포멀함을 베이스로 하면서 점잖게 자신을 드러낸달까. (사실 가격도 차이가 난다 -0-)
어쨌거나 마스터 그리고 바에 앉은 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느지막이 숙소로 돌아와 오랜만에 '곯아떨어졌다'. 혼자 마실 때는 이렇게까지 취하지 않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