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도쿄 긴 교토 (9) - 06.28 / 사바보우즈시, 야끼니꾸
새벽부터 우르르 쾅쾅거리더니 하루종일 비가 옵니다. 사실 지난 일주일 간 이상했어요. 분명히 일본은 장마가 시작됐다는 얘기를 듣고 출발했는데 비가 안 오는 거예요. 여름의 더위와 습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폭우가 쏟아진다는 뉴스가 들리더라고요. 그러더니 드디어 비가 옵니다. 아니 뭐 반가운 건 아닙니다.
비가 내리니까 어디 나가기 싫어서 방에서 점심 저녁을 모두 해결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슈퍼마켓에 다녀왔습니다. 즉석 카레랑 즉석 마파두부를 사 왔어요. 밥이랑 쯔께모노가 있고, 즉석국을 데우면 되니까 이 정도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겠죠. 반바지에 조리를 신고 멀지 않은 거리를 다녀왔는데 쫄딱 젖었어요. 아, 오늘은 나가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
아, 그리고 슈퍼마켓에 가기 전에 코인런더리에 빨래를 넣어두었습니다. 세탁+건조 50분 코스에 800엔. 속옷, 양말, 수건, 티셔츠 등을 모두 빨아 치웠어요. 가기 전에 넣어두고 다녀와서 꺼내는, 효율적인 코스! ㅋㅋㅋ 살짝 덜 마른 부분이 있어서 10분 건조 코스를 한 번 더 돌릴까 싶었지만, 그냥 방에서 에어컨 틀어두면 이 정도는 마를 것 같아서 패스.
어젯밤에 마신 술상(?)을 아직 치우지 않아서 지저분한 방도 정리하고, 빨래해 온 것도 잘 개어서 넣어두고 설거지도 마쳤더니, 배가 고파오더라고요. 근데, 참 사람이 간사한 게... 비 맞으며 힘들게 사 온 즉석 카레보다, 갑자기 사바스시가 먹고 싶더라고요. 제가 교토에 오면 꼭 들르는 곳 세 군데(마츠바 본점, 이즈주, 키요미즈데라) 중 아직 들르지 않은 한 군데, 바로 이즈주의 사바보우즈시 말입니다.
그래, 언제 먹어도 한 번은 먹을 텐데, 그게 오늘이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요. 그래서 우산을 들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숙소에서 가까워요. 그리고 기온 마치(거리)는 보도에 모두 천장이 씌워져 있어서 비를 맞지 않고 다녀올 수 있어요.
이즈주 앞에서 잠깐 멈칫했습니다. 어? 여기가 이즈주 맞아? 왜 이렇게 멋있어졌지? 내 기억 속의 이즈주는 낡고 허름한 가게였어요. 삐걱거리는 테이블과 낡은 의자. 코타츠처럼 테이블 아래쪽에 달린 온열기가 특이했죠. 그래서 역사가 느껴지는 집이라고 생각하면서 왠지 나만 아는 집이라는 착각(이런 번화가에 있는데 ㅋㅋ)을 하곤 했죠. 아, 실제로 100년이 넘은 집이긴 하고요.
오랜만에 왔더니 싹 바뀐 이즈주. 완전 고급 식당의 느낌이 팍팍 납니다. 내부도 완전 달라졌어요. 낡은 테이블들은 없어지고 아예 다다미를 깔고 올라가서 앉아야 하는 좌식 테이블로 바뀌었더군요. 외국인들이 꽉 들어차 앉아있고, 심지어 대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테이크 아웃하기로 했어요. 가격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원래 비싼 집이긴 했는데, 더 올랐더군요. 6개짜리 사바보우즈시가 3천 엔이 넘어요. 우와~
방으로 돌아와서 즉석 미소시루를 데웠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꽁꽁 싸매어져 있는 스시의 포장을 하나씩 벗깁니다. 먼저 종이 포장을 벗기면 대나무잎으로 싸인 포장이 나옵니다.
대나무 잎 포장을 벗기면 드디어 스시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아직 다시마에 싸여 있어요. 다시마에서 나온 끈적한 점액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다시마를 벗기면 드디어! 찬란한 고등어의 푸른 은빛이 번쩍입니다. 바로 이 빛깔이에요.
아, 정말 아름다운 빛깔입니다.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영롱한 빛깔이에요. 교토에 오면 꼭 들르는 이유가 바로 이거죠. 새콤하면서 짭짤하게 간이 된 밥과 잘 절여져서 살짝 익은 고등어살 거기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반짝이는 푸른빛까지. 저렇게 아름다운 빛깔 위에는 굳이 토치질을 할 필요도 없죠. 이 정도의 사바스시는 진짜 국내에서 먹을 수 없어요. 이거 6개 정도 먹으면 엄청 배부릅니다. 보이는 것과 같이 밥의 양이 많아요.
점심을 먹고선, 뒹굴거리기 + 사진 정리 + 브런치 글쓰기 + 가계부 정리 등등 잡다구리한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이번 여행의 모토는 시간 낭비니까요. 그렇게 시간을 내다 버리다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됐습니다. 역시나 카레를 데워 먹으려던 찰나, 몸이 원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너는 지금 며칠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오늘은 고기를 먹어야 할 것이야!
네, 몸이 고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끼니꾸로 검색했더니 가까운 곳에 한국식 야끼니꾸 가게가 있더군요. 아마도 사장님일까? 싶은 아주머니가 한국분이시더라고요. 한국말로 주문을 하니까 세상 편했어요!
첫 번째 모둠 접시를 먹으니 배도 살짝 부르고, 굳이 고기를 더 먹고 싶진 않고, 역시 소고기는 비싸서 그만 먹고, 2차를 갈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제가 와인 잔을 엎었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해서 한 접시 더 주문했어요. 쇼츄도 한 잔 주문했죠. 근데 갑자기 그 쇼츄를 서비스로 주신다는 겁니다. 처음 고기 주문할 때 김치도 서비스로 주셨는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기를 한 판 더 시키고 쇼츄도 한 잔 더 주문했습니다. 결국 ‘가볍게‘ 고기 구워서 밥 먹으려던 계획은 무너지고, 꽤 거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2차도 갈 수 없었어요. 배도 부르고 1차의 비용이 좀 비싸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쪼꼬가 잔뜩 발린 빵을 사다가 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