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도쿄 긴 교토 (11) - 06.29 / Ruins, 이로도리
며칠 전 이쪽 골목을 지나다가 봐 둔 가게입니다. 루인즈(Ruins). 프랑스식인지 이태리식인지는 모르겠는데 와인도 다양하게 팔고 요리도 맛있다는 리뷰를 보고 오늘 저녁을 먹으러 갑니다. 바 좌석이 있어서 혼자서도 괜찮더라고요.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바 쪽 자리는 여유가 있었어요.
일단 화이트 와인을 글라스로 주문했습니다, 처음 나온 것은 Christian Venier의 les perrieres blanc. 와인을 내주면서 ‘피노 그리’라고 알려주더군요. 프랑스의 와인인데 아주 깔끔하고 청량했습니다. 마음에 들었어요.
두 번째 화이트는 Milan Nestarec의 Bel이라는 와인이었어요. 검색해 보니 체코의 내츄럴 와인이네요. 첫 번째 와인이 아주 깔끔했다면 두 번째 와인은 좀 더 상큼하게 자기주장이 있는 와인입니다. 헌데 다음 요리가 너무 빨리 나와버려서 후다닥 마셔버렸어요.
주문한 음식은 ‘2 plates'라는 메뉴였습니다. 셰프 추천 2종 모음 같은 건데요. 오늘 구성은 스프와 스테이크더군요. 조금 더 비싼 메뉴로 ’3 plates'라고 있던데 연어 샐러드가 포함되는 거라 패스했습니다. 아, 물론 다양한 단품도 주문 가능해요.
그렇게 처음 나온 음식은 차가운 스프였는데요. 셀러리 뿌리 스프에 가스파쵸 소르베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스프 안에는 조갯살이 씹힙니다. 첫 스푼을 떠먹자마자 눈이 커졌어요. 맛과 향의 레이어가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그 와중에 가끔 씹히는 조갯살이 매력적이에요. 너무 맛있고 재밌는 스프였어요. 다음 음식이 기대됩니다.
자, 기대하던 다음 음식은 사슴 고기 스테이크와 각종 야채 구이입니다. 사슴 고기는 처음이라 어느 정도의 굽기인지 모르겠지만 소고기로 친다면 미디엄 레어? 레어? 에 가까운 굽기입니다. 타다키인가? 했을 정도니까요. 헌데 이거, 맛있더군요. 인스타에 사진을 올렸더니 누군가 ‘지비에(사냥해서 잡은 고기)?’라고 물어보던데요, 그걸 확인해보진 못했습니다만 만약 지비에가 맞았다면 메뉴에도 써두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양식 사슴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테이크는 아주 부드럽고, 잡내 없고, 맛있었어요. 1300엔을 더 내면 와규로 바꿀 수 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슴 고기를 경험해 볼 만했어요. 거기에 더해서 가니쉬로 올라온 각종 야채들이 참 맛있었어요. 종류도 다양했고요. 역시 교토하면 야채!
스케이크가 나왔으니 레드로 넘어갑니다. 역시나 글라스 와인으로 주문. Casot des Mailloles의 Comax Ethylix라는 프랑스 와인입니다. 쉬라 100%. 강렬한(?) 고기에 어울리는 와인이었습니다. 글라스 와인의 퀄리티가 아주 좋네요. 다음 잔으로 Pierre-Oliver Bonhomme의 Kura(蔵) Rouge를 주시네요. 주시면서 ‘가메(gamay)'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마셔보니 힘이 넘쳐서 도저히 가메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와인이었어요. 블렌딩 한 건가?
요리도 다 먹고 와인도 다 먹었으니 디저트를 한 잔 할까? 싶어서, 바에 늘어선 보틀 중에 눈여겨봤던 깔바도스를 한 잔 주문했습니다. 헌데 보틀에 남은 양이 너무 적어서 새로운 보틀을 찾는다고 한참 걸리시더라고요. 결국 새 보틀은 못 찾고, 가지고 계시던 것 중 30년 산이 있다면서 그걸로 하겠냐고 물어봅니다, 가격은 약 2천엔 정도. 그걸로 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술에 비해서 조근은 비싼 가격, 깔바도스라는 비인기 주종, 뭐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잘 팔리지 않았을’ 술. 그러니 오픈하고 나서 시간이 많이 지났겠죠. 그런 상황이 술에서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30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켜켜이 쌓인 향과 맛의 뉘앙스. 하지만 알콜은 거의 다 빠져서 동글하다 못해 물러진 날카로움. 그리고 잔에 따라진 다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마저 꺼져 버립니다. 아쉽지만 잠깐은 느낄 수 있었던 찬란한 과거, 뭐 그런 맛이었습니다.
솔직히 1차에서 배가 부르진 않았어요. 와인도 더 마시고 싶었지만 루인즈는 좀 비싼 가게라는 느낌. 분명히 맛이 있었고 와인 추천도 좋았지만, 계속 먹고 마시다가는... 그 가격이... 그래서 2차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쿠시가츠 가게를 하나 봐뒀거든요. 이름은 이로도리. 아주 편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도 봐 두었죠.
앉자마자 이모 쇼츄 로꾸와 야채 모듬 5종 그리고 오이 절임을 주문했습니다.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싸게 술을 마시는 데에 딱 좋은 분위기. 사장님(?)도 아주 재미난 분 인 것 같은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별로 대화는 안 해봤지만...
직접 만드시는, 와인과 블렌딩란 매실주라고 하셔서 한 잔 주문. 와인은 잘 안 느껴지지만 마시기 편한 매실주였어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계속 꼬치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버섯, 문어, 새우.
마지막으로 니혼슈 한 잔. 잔에 적힌 한자가 술의 이름입니다. 신세이. 준마이 다이긴조였던가? 그리고 어쩌고 마늘이랑 네기마. 무슨무슨 마늘은 마늘이랑 뭔가가 번갈아 꽂혀있거나 할 줄 알았는데 어딘가에 빨갛게 절인 마늘이었어요 ㅎㅎㅎ
그러고선 방에 올라와서 와인을 한 잔 합니다. 며칠 전에 사뒀던 스페인의 화이트.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는데, 결국 다시 기어 나왔습니다. 12시가 넘은 시각, 본토초로 들어섭니다.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지만, 본토초는 그래도 본토초죠.
어쩌면 이런 장면이 본토초나 기온의 본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낮에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볼 수가 없죠.
이 늦은 시간에 본토초에 들어온 이유는 바로 라멘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에 본토초에서 새벽까지 마실 때면 항상 마지막에 들르던 라멘집. 갑자기 그게 떠오르더라고요. 교토식 쇼유 라멘인 타이호 라멘입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실내.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광경.
제가 좋아하는, 하카타식 돈코츠 라멘과는 전혀 다른 타이호 라멘. 굵은 면발에 짜디짠 육수. 근데 이상하게 술 먹은 새벽에는 생각나는 라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