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비 오는 표선 바다. 이중섭 미술관
드디어 제주에 입도한 첫째 날이 밝았습니다. 약 20일에서 조금 빠지는 날짜 동안 제주에 있을 거라서 지도를 어떻게 그릴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제주도 전체 지로를 그려놓고 돌아다닌 루트만 새로 그리기로 했습니다. 앞으로의 포스팅은 위의 지도와 똑같은 바탕에 돌아다닌 경로만 바뀔 예정이란 얘기죠.
제주에서의 첫째 날.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났다. '평소처럼'. 사실 평소의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단어가 몹시 어색할 수도 있겠다. 나는 절대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여행 내내 몸이 특별히 안 좋은 날을 제외하고는 매우 일찍 일어난다. 새벽 6시? 늦어도 7시에는 일어나는 편.
창 밖을 보니 역시나 비가 주룩주룩. 쉽게 그칠 비도 아니고 우산을 쓰고 산책을 나갈 수 있을 정도의 비도 아니다. 말 그대로 주룩주룩 내리는 비. 어차피 정해둔 일정도 없고 매우 길고 여유롭게 제주에 머물 예정이니까 오늘 하루 정도 창 밖의 비를 바라보며 숙소에서 뒹굴어도 문제가 없다.
마침 옥자의 개봉일이라 아이패드로 넷플릭스를 켰다. 큰 기대를 가지고, 여유롭게 바닥을 뒹굴면서 영화 시청. 기대만큼 대단한 영화는 아니었다. 담고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기대에는 못 미치는 영화였다. 기대가 너무 컸나?
다 보고 나니 슬슬 배가 고프다. 전날 쥔장 아저씨에게 소개받은 '서상 해녀의 집'에 가볼까? 싶어 창 밖을 보니 여전히 외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빗줄기가 아니다. 삼다도(三多島)라 바람이 많은 섬이라는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부는 바람을 보니 역시 제주도구나 싶다. 밥 까지 차려 먹고 싶진 않아서 간단하게 라면을 하나 끓여 먹기로 결정. 페이스북에 그 얘기를 했더니 제주도까지 가서 웬 라면이냐며 난리난리. 아니, 난 굉장히 일정이 여유롭다니까!
서상 해녀의 집에 대해서 잠깐 한 마디. 이곳은 내가 제주 여행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방문한 집이 되고, 가장 애정하는 집이 된다. 나중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정말 끝내주는 곳이다.
라면을 끓이면서 부엌에 난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푸릇푸릇한 감귤밭. 아직은 작고 귀여운 녹색 감귤이 매달려 있다. 아, 난 지금 제주도에 있구나. 라고 느꼈다.
언제였던가? 쥔장 아저씨랑 커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아저씨가 동네분들에게 '왜 밭에 배수로가 없어요?'라고 여쭤본 적이 있으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질문에 대한 답이 뭐였냐면 '배수로? 그게 뭔데?'였단다. 아, 제주도는 땅속이 현무암이라 물이 고이지 않고 자동으로 배수가 된단다. (요즘에는 이런저런 공사를 많이 해서 물이 넘쳐흐르기도 한다고 ㅠㅜ)
뒹굴뒹굴하는 것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와도 너무 온다. 비 맞으면서 담배 한 대 태우다가 문득 '막상 나를 태우고 달려주는 요 녀석'의 사진을 너무 안 찍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비가 와서 깨끗하게 씻기고 있길래 한 컷 찍어봤다. 뒷유리에 크게 써붙여둔 '초보운전'은 잘 보이지 않네.
그렇게 하염없이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를 보면서 뒹굴거리다가 빗소리가 좀 잦아드는 느낌이 들길래 우산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숙소에서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바다와 매우 가까운 곳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걸어갈 수 있는 바닷가의 경치를 좀 봐 두고 싶었다. 앞으로 2주 동안은 숱하게 볼 바다지만 아직 첫인사를 못한 상태였으니까.
숙소에서 나와 감귤 밭을 지나 큰~ 길(제주 일주 도로)을 건너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의 어딘가에 그려진 벽화. 정말 요즘은 어딜 가도 이런 벽화를 하나씩 볼 수 있다.
작은 마을을 지나 해변 도로와 함께 만나는 표선의 바다. 걸어서 5분 정도면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다는 말 그대로 '제주'의 바다라고 느낄 수 있는 바다였다.
아직도 나는 '제주 바다'를 떠올려 보라고 하면 월정리나 곽지 같은 에메랄드빛 바다를 떠올리지 않는다. 나에게 제주의 바다는 제주의 남쪽 특히 표선 부근의 이 바다다. 검은 돌과 거친 파도. 첫 만남과 동시에 내 맘에 강하게 각인된 바다.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며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바라본 바다가 이 정도니, 햇살 쨍~ 맑은 날에는 도대체 얼마나 멋진 풍경을 보여줄까.
이런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여전히 넷플릭스와 왓챠플레이를 이용해 영화, 드라마를 뒤적뒤적. 밀린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왔다는, 굉장히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후배에게 메시지가 왔다. 성산 쪽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어디냐길래 나는 표선이라고 했더니 가깝다면서 거기 분위기도 좋고 커피도 맛있다면서(새로 오픈한 호텔? 에 있는 카페였는데, 분위기가 좋다는 얘기는 들었었다) 잠깐 와서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한다.
하지만!! 나는 빗길 운전이 두려워서 집에서 뒹굴고 있는 초보 운전자. 아쉽지만 빗길 운전이 너무 무서워서 못 나가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헌데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고는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어라? 이게 웬일인가? 싶을 정도. 연락을 받았던 친구에게 다시 연락하기에는 좀 애매한 시간.
에잇! 모르겠다! 하고는 후다닥 외출 준비를 마치고 차를 끌고 나왔다. 길은 젖어 있겠지만 최소한 비가 더 오지 않는다면 운전을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 날씨도 흐리고 혹시 다시 비가 올지도 모르니 미술관 같은 곳을 가보면 어떨까? 하고 검색해보니 서귀포에 이중섭 미술관이 있다. 서귀포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
이중섭 미술관(↗) 주차장은 매우 작았다. 슬쩍 둘러보고는 도저히 세울 방도가 없다고 판단. 일단 차를 꺼내서 슬금슬금 거리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왠지 차를 세워도 될 것 같은 자리가 보인다. 그렇게 대충 차를 세워두고는 돌담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꽤 잘 정비되어 있는 작은 정원들과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이중섭의 작품이 뭐가 있지?'하고 떠올려보니 모두가 알고 있을 바로 그 두 개 정도가 떠오른다.
미술관 자체는 큰 감흥이 없는 건물이라는 게 좀 아쉬웠고, 미술관 내부는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다면 촬영 가능. 그래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전시물 두 개를 사진으로 남겨놨다.
솔직히 말하면 꼭 가봐야 하는 곳일까? 싶을 정도로 '그림'에 대한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보고 싶은 그림들은 모두 사본이었고, 미술관의 크기 자체도 별로 크지 않아서 전시작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중섭이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좀 더 알 수 있는 미술관이었다.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엄청 많이 볼 수 있었다. 부인,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편지들.
그래서 기대했던 것에는 훨씬 못 미치는 곳이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좋았던 미술관이었다.
하지만 '이중섭'이라는 브랜드 효과는 대단했다. 미술관 앞은 '이중섭 거리'가 되어 있었다. 카페와 독특한 기념품 가게들. 비가 와서 사람들이 적었지 맑은 날 특히 주말에는 관광객들로 엄청 붐빌 것이 당연해 보이는 거리.
가만히 거리를 걷다가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다 보니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메뉴를 결정하는 데 고민이 많았다. 차를 가지고 나왔으니 숙소로 돌아가서 차를 세우지 않는 한 술을 마실 수가 없다. 그렇다면 뭔가를 포장해서 숙소로 돌아가 저녁을 먹어야 할까? 아니면 차를 넣어두고 숙소 근처에서 먹을까? 아, 숙소가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그건 안 되겠구나. 그러면 술을 마시지 않고 저녁만 먹어야 하나? 등등 고민에 고민을 계속하다가, 일단 근처에 뭐가 있는지나 알아보자 싶어서 수요미식회 지도를 열어보니 근서에 아서원이라는 짬뽕집이 수요미식회에 나왔다길래, 그럼 거기 가서 술 없이 짬뽕이나 먹자! 고 결정.
음. 결론적으로 아서원(↗)은 다시 가고 싶은 집은 아니다. 짬뽕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괜찮았다. 자주 보던 빨간 국물의 짬뽕이 아니라서 비쥬얼이 좀 특이한데, 맛도 평소에 먹던 스타일은 아니다.
보기엔 별로 안 매워 보이지만 매운 정도는 만만치 않다. 고기 육수를 사용해서 두툼하긴 한데, 해물 육수를 같이 쓴 건지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면이 좀 두꺼운 편이긴 한데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 좀 짜다. 달지 않아서 짠맛이 더 강하게 치고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반적인 짬뽕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 후기를 보면 나가사키 짬뽕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비슷하지긴 하지만 그쪽과도 스타일은 다르다. 숙주가 너무 푹 익은 것은 좀 아쉬웠다.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짬뽕 때문이 아니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 손이 놀고 있음에도 바닥에 떨어진 휴지 같은 걸 아무도 치우지 않는다. 그래서 가게 바닥에 온통 휴지나 나무젓가락을 포장하고 있던 비닐이 굴러다닌다. 셀프서비스는 가게 방침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다. 선불로 계산하는 것도 가게 방침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다. 불친절한 것도 뭐 그러려니 하는 편이다. 하지만 자기 가겐데, 떨어진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도 납득이 잘 안 된다.
우연히 내가 방문했을 때, 딱 그런 상황이었는지 뭐 그런 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몇몇 지인들에게 했더니 방송에 좀 나오고 나서 많이 변했다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가게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길래 맥주를 몇 캔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젯밤 쥔장 아주머니가 주신 수박을 잘라서 맥주와 함께 먹으면서 지도 정리를 좀 했다. 제주도에 왔다고 하니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으로 엄청나게 많은 분들이 맛집을 추천해주셨다. 어떤 분은 제주도로 발령받으면 공유하는 자료라면서 A4 용지 약 7-8장 정도 되는 맛집 리스트를 공유해주시기도 했다. 이걸 한 번에 볼 수 있어야 식당 선택이 편하겠구나 싶어서 카카오 지도(그러고 보니 당시에는 다음 지도였나?)에 쭉~ 정리해 넣기 시작했다.
공유받은 자료들 중에서 주소나 전화번호가 이상한 집을 제외하고 모두 입력한 결과 위와 같이 제주도 곳곳의 맛집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이제 어디를 돌아다니던 지도 앱을 켜서 근처에 어떤 식당이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위의 지도는 축소한 상태라 모든 정보가 표시되지 않은 장면이다. 정확하게 100개의 맛집을 등록해놨다.
물론! 저 많은 곳을 다 가보진 못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