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월정리 우드스탁. 비자림. 친봉산장.
서울을 출발한 지 19일째 되는 날이자 제주에 들어와서 두 번째 맞이하는 아침. 그리고 여행을 시작한 이후 세 번째로 맞이하는 금요일. 뭐랄까 '금요일'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약간의 압박감을 주는 단어다. '금요일이니까 신나게 놀아보자!'라는 식의 압박이 아니라 금요일 밤이 되도록 약속이 없으면, 그러니까 금요일을 집에서 혼자 보내면 기분이 너무 다운돼서 한없이 우울해지기 때문에 금요일에는 어떤 식으로든 약속을 만들어서 술을 한 잔 해야 하는, 그런 압박이다.
뭐, 지금은 어차피 여행 중이니까 어차피 혼자. 그리고 집이 아니니까. 다행히 그런 류의 '압박'은 없었지만 어제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싶지는 않았다.
아침까지는 비가 내렸지만, 점점 비는 그치고 있었다. 날씨가 흐리기는 했지만 비가 내리지는 않았으니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에 내려왔으니 꼭 만나봐야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는데, 올댓제주(↗)는 다녀왔고 우드스탁(↗)도 빨리 다녀와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나의 숙소는 표선, 우드스탁은 월정리. 그렇다면 동쪽 해안 도로 드라이브 코스! 이렇게 결정하고 숙소를 나서려는데, 쥔장 아저씨께서 커피 한 잔을 하자고 하신다.
작업실로 가서 어제 봤던 그 멋진 드립 테이블을 다시 보게 됐다. 쥔장 아저씨가 직접 만드신 것.
이날의 원두가 뭐였는지는 까먹었지만, 굉장히 향기롭고 맛있었다. 그리고 쥔장 아저씨랑 정말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시다가 퇴직하시고 제주로 넘오 오신 이야기, 서각 작업하시는 이야기들을 듣기도 하고 IT 회사를 다니다가 퇴직을 결심하고 전국 여행을 떠나게 된 이야기, 자동차 뒤에 '초보운전'이라고 커다랗게 붙여둔 이유 같은 걸 말씀드리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남자 둘이서 수다를 떨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11시가 넘었다. 어이쿠, 이제 출발해야지~!
비는 내리지 않지만 여전히 흐리디 흐린 날씨. 사진을 찍은 해변이 정확하게 어딘지는 모르겠다. 그냥 한참을 달리다가 안개가 너무 자욱하길래 차를 잠깐 세워두고 담배 한 대 태우면서 찍었던 사진들.
솔직히 해안도로 운전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커브를 따라 핸들을 돌리고 어느 포인트에 액셀을 밟고 어느 순간에 엑셀을 떼어야 하는 건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자꾸 브레이크를 사용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속도는 자꾸 느려지고 그렇게 내 뒤에 차가 따라붙으면 오른쪽으로 피해 주고...
아웃사이드 인 - 인사이드 아웃 이라거나 브레이크 인 - 액셀 아웃 같은 건 안다. 레이싱 게임을 할 때는 완전 슈퍼 베스트 드라이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초보운전자일 뿐. 하염없이 핸들을 꺾고 액셀을 밟았다 뗐다 하면서 감을 익힌다. 사실... 아직도 이런 커브길은 빠르게 달리지 못하겠다. 뭔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드디어 월정리 도착. 사람들이 엄청 많다. 그리고 드디어 쥔장 형님의 새로운 가게에 입성. 2층에서는 건대 시절의 우드스탁을 살짝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훨씬 더 깔끔하고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월정리의 예쁜 바다를 그대로 담고 있는 카페 - 우드스탁(Woodstock)
월정리 바다는 남쪽 바다 특유의 에메랄드빛이다. 누군가는 제주의 바다 중에서 '색'이 가장 예쁜 곳은 월정리가 아니겠냐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거야 개인의 취향. 나는 표선의 바다가 더 좋다. 어쨌든 월정리의 바다가 예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날씨가 그리 좋지 않은데도 이런 색깔을 보여줄 수 있다니.
가게를 구경하고, 월정리 사진을 좀 찍다가 우드스탁 형님이랑 같이 점심을 먹었다. 월정리에는 맛집 없다면서 김녕의 한라식당(↗)으로. 흑돼지 주물럭을 먹었는데, 오~ 이거 맛있었다. 반찬들은 간단했지만 저 주물럭 자체가 너무 맛이 좋아서 순식간에 밥 한 공기 뚝딱.
다시 우드스탁으로 돌아가 구좌 당근쥬스를 한 잔 마시고, 여행 메모를 좀 정리하다가 출발~ 비가 그쳤으니 산책을 좀 해볼까? 마침 근처에 비자림(↗)이 있길래 목적지는 그곳으로 정했다. 물기를 살짝 머금어서일까? 숲의 느낌이 참 좋았다. 습기와 녹빛이 스며든 공기의 느낌.
그리고 정확한 수령은 모르겠지만 세월을 한껏 품고 있을 것만 같은 비자나무들의 자태도 좋았다.
그렇게 길지 않은 비자림 산책. 딱 기분 좋은 정도.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살짝 업된 기분으로 주차장에 왔더니 뭔가 재밌는 장면. 제주에서 여행을 하다 보면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인데, 주차장에 가면 온통 흰색 차들이다. 렌터카는 역시 흰색이 인기가 많은가 보다.
안 그래도 습도가 높은 제주에서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거기에 산책까지 하고 나니까 살짝 덥고 찝찝한 느낌? 어딘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주에 살고 있는 친구가 추천해준 친봉산장(↗)을 방문했다.
정말 한적한 곳에 있어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의외로 커피는 알코올(럼주)이 들어간 아이리시 커피 외에는 팔지를 않는다. 그래서 스파클링 애플 쥬스를 마신 것이 조금 아쉬운 점. 그래도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슬슬 날씨가 좋아지고 있다. 내일은 좀 더 화창한 제주를 볼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슬슬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의 저녁은 숙소 쥔장 아주머니가 챙겨주신 짜장을 이용한 짜장밥. 소고기 뭇국은 마트에서 파는 것. 곰소에서 서비스로 받은 젓갈 3 총사. 마트에서 산 오이 피클과 역시 아주머니가 챙겨주신 오이를 몇 개 잘라서. 소주는 대천 부근에서 샀던 걸 아직 다 못 마셔서 여전히 O2 린.
저녁을 다 먹고 나서 아드벡을 한 잔 마시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들썩들썩한다. 이것도 금요일의 영향인가? 하지만 제주시까지 택시를 타고 나가는 것은 너무 오바라는 것을 첫째 날 깨달았다. 하아. 뭔가 아쉬운데...
그러다가 검색해보니, 숙소 근처에 있는 해비치 리조트&호텔(↗). 그곳 1층에 '99 bar'라는 바가 있었다!! 전화로 영업시간을 물어보니 12:30까지 라스트 오더, 01:00까지 영업. 딱이군! 표선 콜택시를 부르니 5천 원.
첫 번째 잔은 해비치 10주년 기념 와인. 호텔이나 리조트에 묵지 않는 손님이 혼자 찾아오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 일인지 바텐더가 신기해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길래 바텐더와 수다 시작.
두 번째 잔은 베이스가 뭔지 까먹은(아마도 탈리스커?) 하이볼 한 잔.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비키 하모니를 한 잔 더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선 숙소를 2주나 잡아놨으니 몇 번 더 오게 되겠다는 예상을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다시 찾진 않았다. 꽤 괜찮은 바였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