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겨울 목포 여행 #17 - 구도심 ; 항구와 시장을 따라
구도심을 걷다가 어느덧 해가 저물었습니다. 구도심을 여기저기 둘러 보는 건 보통의 여행자들에게 하루 정도면 충분한 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루를 늦게 시작하고 일찍 마무리하는, 조금 게으른 여행자거든요. 이런 저에게 구도심은 하루만에 모두 돌아보기에 넓은 공간이었나 봅니다.
어쩔 수 없이 저녁을 먹고 산책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책은 마무리했지만, 사실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해가 진 다음, 밤의 시간이 여행에서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하루하루의 동선이나 스케줄은 낮의 산책보다는 밤의 식사와 그 이후의 음주에 중점을 두고 계획하는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에도 안전한 나라인 한국과 일본을 주로 여행하는 것이기도 하죠.
어쨌든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 얘기들은 다른 포스팅에서 하고 있으니, 다시 구도심 얘기로 돌아와서요.
다른 날, 다시 구도심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구 목포세관에서부터 시작해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가 볼 생각입니다. 시장과 부두가 있는 지역이니까 재미난 건물들이 많은 거리일 것 같습니다.
구 목포세관은 이름 그대로 예전에 목포세관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옛 세관 창고 자리에 미식문화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더군요. 바로 앞에는 구 세관터를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옛날 세관자리구나, 하고 넘어가기엔 이곳에도 현대사의 아픔이 녹아 있는데요. 이 세관이 한 때 중앙정보부 목포분실로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5·18 민주화운동 목포 사적지 제4호 표석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해상 봉쇄령이 내려졌고, 이에 분노한 시위대가 이곳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민주화 인사들의 고문도 행해진 곳이라고 하는데요.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개항하면서 세워진 세관이 군부독재 시절 국민을 탄압하던 기관의 건물로 사용됐다는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소라고 느껴집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습니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특이한 건물이 보이고, 그 건물의 사진을 찍고 나면 그 안쪽 골목에는 재밌는 건물이 보이고, ... 그렇게 건물이 이끄는 대로, 거리가 이끄는 대로 방향을 잃어버린 것처럼 한참을 걸었습니다.
정말 다양한 건물이 혼재되어 있네요. 하지만 분명한 건, '최근의' 건물은 없네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 전후에 지어진 것, 6~7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 등 말 그대로 한국의 근현대에 지어진 건물들입디다.
그 시간의 흔적과 그 시기의 생활상들이 그대로 남아 이 거리에 분명히 색다른 공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지금은 대중음악의 전당으로 쓰이고 있는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을 만났습니다. 분명히 건축의 양식은 일제강점기의 그것입니다만, 호남은행은 일제의 자본에 대항해 민족의 자본으로 세워진 은행이었다고 합니다. 건물의 규모나 양식도 구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밀리지 않도록 웅장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사진을 자세히 보면, 목포(木浦)의 한자가 이상한 걸 볼 수 있습니다. '포(浦)'의 오른쪽 위에 점이 하나 빠져 있는데요. 당시 설립자가 이 점은 대한독립 이후에 찍겠다고 다짐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목포의 구도심은 참 다채롭습니다. 뻔한 시골의 번화가 골목 같아서 지루하다가, 중간중간 나타나는 독특한 건물들 때문에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다가, 별생각 없이 지나친 골목 안쪽에 더 재밌는 것이 있을 까봐 목적지를 잊고 빙빙 돌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다리가 아파서 좀 쉬어가자는 생각이 들죠.
그렇게 구석구석 거리의 풍경을 모으다 보면 아, 거리는 이렇게 시간을 담는구나. 도시는 이렇게 세월을 보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문화가 옛 것 위로 다시 쌓이기 시작할 테죠.
목포는 아직 새로운 것이 쌓이지 않은 곳이기에 이렇게 과거의 시간을 많이 담고 있고, 드러내고 있는 도시입니다. 목포의 구도심은 저에게 그런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