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가라쓰와 요부코 - #12 스탠드바 헤네시
가라쓰의 골목골목에도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골목에는 사람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아요. 평일 오후라서 그런 걸까요? 겨울이라 그런 걸까요? 정말 조용한 도시라는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
번화가 구역이라고는 하지만 걸어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앞선 가게에서 나오기 전에 구글맵과 타베로그를 이용해서 다음 가게를 미리 찾아두고 움직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걸어가는 도중에 궁금한 가게를 만난다면 계획을 변경할 수는 있어야겠죠. 미리 찾아둔 가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요.
구글맵으로 찾아낸 곳입니다. 이미 동네에서는 유명한 곳이더군요. 스탠드바 헤네시(Stand Bar Hennessy)라고 적혀 있어요. 스탠드바? 타치노미(立ち飲み) 같은 걸 얘기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가게는 아담한 규모였습니다. 7~8개 정도의 스툴이 놓여 있는 카운터 석이 전부입니다. 백바에는 다양한 술이 진열되어 있어요. 최근 유행에 맞춰 몰트 위스키의 종류가 많고, 스카치 위스키나 버번 위스키도 보입니다. 칵테일용 리큐르들도 있고요.
가게 한편에 작은 오크통이 두 개 있었어요. 하나는 맥캘란(Macallan)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하나는 보모어(Bowmore)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정말 술이 들어 있는 거냐고 여쭤봤더니, 처음엔 해당 술을 사 온 것이 맞다고 하네요. 하지만 너무 옛날 일이고, 지금은 그저 장식용이라고 합니다.
이 바의 가장 큰 특징은 바텐더입니다. 백발의 노신사분께서 혼자 운영하고 계신 곳이에요. 가게 한편에 걸려 있는 바텐더 자격증에 '쇼와(昭和) 48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럼 1973년에 자격증을 취득했단 얘기니까 벌써 경력이 53년이라는 얘깁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바텐더를 해오신, 백발의 노바텐더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이 궁금해졌습니다.
저는 칵테일을 주문할 때 이름으로 주문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그 다양한 칵테일의 이름들을 다 외우고 다닐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지금의 제 상황이나 기분을 말씀드리고 어울리는 칵테일을 추천해 달라고 하거든요.
지금 배가 부르니 배를 꺼뜨릴 수 있는 칵테일을 부탁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달콤한 것도 괜찮다고 했더니 만들어 주신 것은 알렉산더입니다.
브랜디를 기주로 사용하고, 크램 드 카카오라는 초콜릿 맛이 나는 리큐르와 우유를 섞은 칵테일입니다. 배가 부르다고 했으니 달콤한 디저트를 만들어주신 느낌이었어요.
다음으로는 탄산이 들어간 칵테일을 부탁드렸더니, 싱가폴 슬링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진 베이스에 체리 리큐르와 탄산수를 섞은 칵테일이에요. 시원하게 후루룩 마실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가게의 칵테일은 사실 요즘 스타일은 아닙니다. 최근 일본의 칵테일은 칼로 잰 것처럼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을 추구하는 느낌이거든요. 하지만 이곳의 칵테일은 투박하면서 정감이 가는, 옛날 스타일의 칵테일이에요. 오너 바텐더에게서 느껴지는 온화함이 칵테일에서도 느껴지는 듯합니다.
옆 자리에는 저와 동갑의 재생 에너지 관련 엔지니어가 혼자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삿포로에서 이곳까지 출장을 온 거라고 하더군요. 한 달에 1주일 정도씩, 자주 출장을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바의 단골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동갑 엔지니어와 오너 바텐더 그리고 저, 세 명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갑니다.
마지막 잔으로 모틀락(Mortlach) 12년을 주문했습니다. 마셔본 적이 없는 위스키였어요.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위스키인데, 밸런스가 좋은 전형적인 싱글 몰트라고 느껴졌습니다. 피트는 거의 느끼지 못했고, 마냥 마시기 좋게 부드럽기만 한 요즘 스타일도 아니었어요. 탄탄하게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잘 만든 위스키의 느낌입니다.
계산을 하고 일어서려고 하니까 선물로 커다란 귤을 두 개 주셨습니다. 맛은 특별할 것이 없는 귤이었지만, 바텐더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외로움을 조금 덜어주었던, 귤이었습니다.
가라쓰에서, 어찌 보면 가장 유명한 바일 겁니다. 53년을 영업하셨으니까요. 세월만큼의 따뜻함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긴자의 칵테일을 기대하면 안 되잖아요, 이곳에선 이곳의 칵테일을 경험해야죠. 오랜 업력의 오너 바텐더와 따뜻한 분위기가 장점인, 스탠드바 헤네시입니다.
참고로 '스탠드바'라는 것은 타치노미(立ち飲み)의 서양버전으로 보면 될 것 같은데요. 타치노미는 아직도 실제로 서서 마시는 곳이지만, 스탠드바는 이제 카운터에 앉아서 마시는 작은 바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사실 70년대에 주로 쓰던 말이고 최근에는 별로 사용하는 단어도 아니라고 해요. 그러니 이 가게가 그만큼 오래됐다는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