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시모지섬, 이라부섬 그리고 미야코규
별생각 없이 일찍 일어났다. 물론 평소의 나에게 이르다는 뜻이다. 아마 평균적인 여행객들이라면 훨씬 더 일찍 일어나 하루를 서둘러 시작하고, 더 많은 곳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먹으려 하겠지. 하지만 나는 여행할 때 그리 서두르지 않는 편이다. 숙소를 예약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스케줄도 미리 짜두지 않는다.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편.
아침 바람을 쐬러 숙소의 마당에 나가보니 어제 만났던 교대생이 휴대용 기타 - 울림통이 없고 지판만 있는 기타 - 를 퉁기고 있다. 뮤지션이 꿈이라더니 음악적인 영감을 얻기 위한 여행을 떠나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한 명, 고베의 서버 프로그래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오늘은 셋이서 함께 돌아다니기로 했으니 좀 더 기다려야 할 분위기. 교대생에게 가까운 곳으로 바다 구경이나 가자고 제안했다. 한 30분 정도면 돌아보고 올 수 있지 않을까?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가마하마 비치(長間浜)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말이 주차장이지 단단한 흙바닥에 이름 모를 활엽수의 잎들이 잔뜩 떨어져 있는 작은 공터 같은 곳이다. 잠깐만 걸으면 꽤나 큰 해변이 보인다. 이른 아침 - 어디까지나 나에게는 - 이라서라기 보다는 비수기라서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해변.
대단히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침식(?)된 지형이 쭉~ 연결된 해안가의 모양이 특이했다. 뮤지션을 꿈꾸는 학생은 악상이 떠올랐는지 혼자서 해변의 끝에서 끝까지 걷다가 다시 휴대용 기타를 꺼내서 잡았다. 그걸 지켜보며 가만히 앉아 이른 아침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채 정돈하지 못한 머리와 아직 로션을 바르지 못한 뺨을 스쳐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고베의 서버 프로그래머가 마당에서 부시시한 얼굴로 자기를 버리고 출발한 줄 알았다며 씨익 웃는다. 금방 세수하고 내려올 테니 출발하자면서 방으로 들어간 그의 뒤를 따라 우리도 채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짐을 챙길 것이 좀 많았다. 히비스커스에서의 숙박은 오늘로 끝이었으니 나는 사실 체크아웃을 하는 것이었다. 뭐 어디 멀리 가는 것은 아니라서 짐을 차에 싣고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다음 숙소에 가져다 두면 되는 것이긴 했지만.
어차피 미야코의 일정이 3일이나 더 남았는데 체크아웃을 하고 다른 곳으로 숙소를 옮긴다고 하니 마스터인 텟짱이 섭섭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마음껏 틀 수 있는 에어컨이 필요했다. 이때는 그랬다. 이때까지는...
교대생은 렌트를 하지 않았고, 나와 고베 프로그래머는 렌트를 했다. 그러니까 차는 두 대에 사람은 세 명. 교대생과 고베생은 오늘도 같은 숙소에서 묵어야 하니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혼자 운전을 하기로 했다.
일단은 숙소에서 출발해 이라부 대교(伊良部大橋)의 남단에 차를 세웠다. 오늘의 목적지는 이라부 섬과 시모지 섬. 고베에서 온 형님은 일본인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에 자기가 안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나이가 가장 많아서 안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성향이 그런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결론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었다.
이라부 대교는 일본에서 가장 긴 무료 다리라고 한다. 통행료를 내지 않는 다리 중에서 가장 긴 다리라는 얘기. 3,540m 니까 3 킬로가 넘는 거리다. 다리 중간에 차를 세울 수 있는 포인트가 몇 개 있어서 차를 세우고 경치를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이라부 대교 위에서 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던 고베 형님이 다음 목적지로 정한 곳은 이라부섬의 사와다노하마(佐和田の浜). 그러고 보니 지금에 와서 생각이 든 건데, 하마(浜)도 결국 비치(ビーチ)라는 뜻이다. 그러니 전부다 해변이라는 말인데 어떤 곳은 '하마'라고 하고 어떤 곳은 '비치'라고 부르는지 차이점을 모르겠다.
잠깐 검색을 해보고 돌아와도 그 차이점은 여전히 모르겠다. 나중에 일본인 친구들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해보지만... 내가 이걸 계속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들이 제대로 된 답변을 해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없는 해변. 비수기이기 때문에 사람이 없는 것이었을 거다. 날씨가 좋았다면 엄청난 풍광을 보여주었을 것이 분명한 해변에서 칙칙한 남자 세 명이 사진을 찍고, 바람을 맞고, 햇볕을 쬐고, 모래를 밟고, 물장구를 치다가 누군가가 문득 '남자 셋이서 지금 뭐 하는 거죠?'라는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지만 당연히 누군가가 꺼내고야 마는 그 말을 날렸고, 모두 같이 어색하게 웃었다. 글로 써 놔도 어색하고 뻔한 이 느낌 그대로.
고베 형님이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있다며 데리고 온 포인트는 시모지마 공항(下地島空港)의 바로 뒤편. 지도로 표시하자면 이곳이다. 어쩌면 시모지섬(下地島)에서 가장 유명할지도 모르는 곳. 시모지마 공항의 활주로 가 끝나는 지점이다. 이륙하거나 착륙하는 비행기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인데, 바다 위에서 공항을 향해 내려오는 비행기의 모습을 아주 근접해서 촬영할 수 있는 포인트다. 게다가 바로 그 바다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물 빛.
사진에 보이는 구조물들은 아마도 착륙을 유도하기 위한 유도등인 듯. 공항이 워낙 작으니까 유도등을 바다 위에 설치해야 했나 보다.
공항이 워낙 작아서 실제 운행하고 있는 노선이 매우 적다. 지금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니 성수기인 경우 하루에 2-3편 정도. 도쿄/오사카/홍콩 노선. 그러니 실제로 착륙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선 비행시간을 제대로 확인하고 가야 한다.
아마 고민이 많았을 거다. 이 두 명의 외국인에게 무엇을 먹여야 할 것인가. 고베 형님이 내린 결론은 이곳이었다. 이치와(魚市場 いちわ). 구글맵 평점이 나쁘지 않았고, 다양한 메뉴를 고를 수 있는 곳. 내가 선택한 것은 생선 까스였고 준수한 맛이었다.
다양한 메뉴를 파는 곳인데 구글맵에 있는 평가를 보면 참치와 가다랑어가 괜찮다는 듯. 일본에서 라멘을 먹어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그 '식권'을 자판기에서 구입하는 시스템이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일행이 있다 보니, 그리고 차가 두 대이다 보니 미리미리 목적지를 정해두어야만 한다. 두 대가 바짝 붙어서 돌아다닐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건 그다지 안전한 방법은 아니다. 어쨌든 원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는데 마침 두 대가 같이 신호에 걸려 있었고, 고베 형님이 깜빡이로 목적지 변경을 알려줬다.
이라부 대교 북단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한 잔씩 마시기로 했다. 주차장이 꽤나 컸고, 커피 트럭 같은 것이 하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칙칙한 남자 세 명은 무슨 얘기들을 나눴을까? 딱히 영어로 얘기를 하지도 않았고, 내가 일본어를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닌데. 교대생은 일본어를 거의 못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우리는 별로 불편한 걸 모르고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미야코섬으로 넘어와서 아주 유명한 해변으로 가자더니 입구가 영 썰렁하다. 그리고 꽤 높은 모래 언덕을 넘어가야 한다. 사실 거리가 그렇게 긴 것도 아닌데 바닥이 모래이다 보니 몇 배는 더 힘들게 느껴진다. 음... 운동을 별로 안 하는 아저씨에게만 힘든 고개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곳은 스나야마 비치(砂山ビーチ). 미야코 여행을 계획했다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일 거다.
마침 하루 종일 흐리다가 해가 잠깐 구름을 벗어나거나 아주 엷은 구름에 가려서 '흐리지 않은 거 아닌가?' 싶은 햇살을 느낄 수 있게 되자 바다의 색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역시 바다의 색은 하늘의 색이다. 제대로 된 햇살 없이는 바다의 색을 제대로 느낄 수 없으니 말이다.
해변 한켠의 기암괴석 덕분에 특이한 분위기의 사진을 찍을 수 있기도 하지만, 이곳의 좋은 점은 역시 고운 모래와 에메랄드빛의 바다다.
이틀 동안 돌아다닌 이 부근의 바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해변이었다. 하지만 성수기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비수기에 한적한 바다를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오키나와 본섬을 여행할 때 국제거리에서 소금을 특산품으로 파는 가게를 본 적이 있었다. 특이하게 소금 아이스크림을 팔길래 먹어봤었는데, 바로 그 소금과 아이스크림을 이틀 연속으로 만나게 됐다. 어제 혼자서 왔었던 유키시오 제염소(雪塩製塩所)를 다시 방문했기 때문.
어제는 소금 사이다를 마셨으니 오늘은 소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고베 형님은 오미야게(おみやげ)를 준비하는 건지 꽤 많은 소금 관련 제품을 사더라. 아, 일본 사람들은 어딘가 여행을 다녀오면 주변 사람들에게 여행지의 특산물을 선물하는데, 그 선물을 오미야게라고 한다. 우리도 휴가를 다녀오면 특산물을 사 가곤 하니까 비슷한 문화라고 볼 수 있을 듯. 물론 그 '범위'와 '준비 강도'는 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유시키오 제염소에서 이케마섬 쪽으로 가지 않고 이번엔 니시헨나자키(西平安名岬) 쪽으로 올라갔다. 미야코섬의 가장 북쪽. 다시 말하지만 '자키'는 '곶'이라는 뜻.
흐린 하늘과 잔잔한 바다. 그리고 맑은 물빛. 관광객은 아예 없었고, 생활 낚시를 하시는 주민이 한 분 계셨다. 간단한 산책을 하고, 자판기에서 음료를 하나씩 뽑아 마시고 나서 일행과 헤어져야 했다. 슬슬 다음 숙소에 체크인해야 하는 시간이 된 것.
게스트하우스 텐노와야(宮古島ゲストハウスTENOWAYA)는 미야코 섬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아마도?)에 있는 숙소였다. 작은 골목 안에 있는 숙소였고, 간판이 크게 달려있지 않아서 숙소를 찾거나 주차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숙소에 체크인하고, 이런저런 안내를 받고 나니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 식당 검색하는 것이 귀찮아서 마스터에게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직접 전화로 예약까지 해주었다. 숙소도 식당도 마스터가 젊은 걸 보니 동네 친구들인가 보다.
추천해준 가게는 와토와(わとわ). 미야코규(宮古牛) 그러니까 미야코의 소고기를 구워주는 가게다. 이시가키 섬에 갔을 때 먹었던 이시가키규가 떠올라서 엄청 기대했다. 당시 이시가키규는 일본 본토에서 유명한 3대 소고기(미야자키, 고베, 마츠자카)의 원조라는 이미지로 유명한 소고기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최근에는 미야코규가 이시가키규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고 한다.
젊은 주인장과 젊은 점원들이 친절하게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거기에 정성껏 구워준 미야자키규 그리고 신선한 야채 구이를 더하니 '요즘의 미야코'는 이런 분위기인가 싶다. 어제 갔던 곳은 '전통의 미야코'였는데 말이다.
푸짐하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선 숙소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다른 손님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았으니 혹시 밤에는 함께 모여서 한잔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편의점에 들러 아와모리와 물 그리고 간단한 안주를 샀다. 그리고 좀 이른 시간이지만 숙소로.
숙소에는 말 그대로 아/무/도 없었다. 마스터도 없었다. 손님들도 없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던 걸까? 결국 혼자 마시다가 씻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