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큐슈 일주를 위해 미야코를 떠나다
어젯밤에 짐을 다 싸놓긴 했지만 아침에 추가로 정리해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잘 때 입었던 옷이라던가 샤워 후에 사용한 로션 같은 것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잊은 물건 없이 깔끔하게 방을 정리하고 며칠간 묵었던 TENOWAYA(↗)의 주인장들과 인사를 했다. 텐노와야에 묵은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을 하나 획득(?)했다. 1층으로 내려와 구글맵에 저장해둔 렌터카 회사를 목적지로 설정하고 출발! 오늘은 드디어 미야코섬을 떠나는 날이다. 총 5박 6일의 미야코 일정이 끝났다. 오늘의 목적지는 후쿠오카.
일본 국내선인데도 미야코 공항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서울에서 출발해 나하 공항을 거쳐 미야코 공항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미야코 공항에서 출발해 역시나 나하 공항을 거쳐 후쿠오카 공항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도 국제선이 아니고 국내선이라서 각종 수속이 간편한 것은 다행.
렌터카 회사에 차를 반납하러 가서 살짝 긴장했다.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으로 살펴보면 나도 몰랐던 흠집 같은 것을 발견하는 거 아냐? 같은 선입견.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동경 부근의 사람들과는 느낌이 좀 다르다. 특히 오키나와의 일본 사람들은 너무 여유로워서 중국사람 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무사히 차를 반납한 뒤 셔틀을 타고 공항으로. 사람이 너무 없어서 수속이 엄청 금방 끝나버렸다. 너무 서둘렀나...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한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기 때문일까? 배가 좀 출출하길래 공항 매점에서 카레라이스를 하나 사 먹었다. 밥을 먹고 담배를 태우고 핸드폰 게임을 해봐도 두 시간이라는 시간은 지겨운 시간 ㅠ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길래 고개를 들어보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보인다. 수학여행이라도 가는 걸까? 아니면 수학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는 걸까? 아, 아즈망가 대왕에서 오키나와 수학여행을 다녀온 에피소드를 보면, '낙도 체험'이라는 걸 하던데 저들은 미야코섬을 선택한 걸까? 그럼 이제 오키나와로 돌아가서 다른 학생들과 다시 만나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담배를 태우러 흡연실에 와보니 날씨가 끝내준다. 아, 역시 이런 거구나. 미야코섬에 있는 동안 쭈욱~ 날씨가 별로이더니 떠나는 오늘은 엄청난 날씨를 보여주는구나. ㅠㅜ
정각 12시에 비행기가 출발했다. 떠나는 날의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고, 그 하늘을 담고 있는 미야코섬의 바다는 눈물 나게 파랬다. 아, 미야코 블루(MIYAKO BLUE)...
50분의 비행이 끝나고 나하 공항에 도착했다. 내려서 짐을 찾고 어쩌고 하다 보니 1시가 조금 넘었는데, 나하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Skymark는 14:40 출발이니 시간이 좀 남는다. 그렇다면... !!!
나하 공항에 A&W가 있는지 검색해봤다. 오! 역시 있다! 있어! 오키나와에서 가장 유명한 체인이니까. 오키나와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루트 비어와 A&W의 버거를 먹고 싶었다. 꽤나 줄을 길게 서 있어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기다려서 모짜 버거와 루트 비어를 획득했다. 아, 오키나와의 맛. 아니 사실은 오키나와의 맛이라고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맛.
햄버거로 점심을 해결하고 14:40 비행기에 탑승했다. 약 한 시간 삼십 분의 비행을 마치니 드디어 후쿠오카 공항이다. 사실상 이번 여행이 시작됐어야 하는 곳. 호텔에서 하루만 묵고 내일은 사세보로 이동할 것이지만, 오랜만에 후쿠오카에 왔으니 밤에는 좀 놀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호텔은 나카스 근처로 잡았다. 여러 번 와본 곳이니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로 호텔까지 이동.
다섯 시쯤 호텔에 도착했으나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린 다음 건조기에 넣고 말리느라 막상 저녁을 먹으러 나온 시간은 일곱 시가 넘었다.
사실 처음 후쿠오카에 왔을 때 '나카스 뒷골목(?)' 쪽은 무서워서 걸어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여행 책자에는 나카스의 골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유흥업소들이 즐비한 곳이니 아이들과 함께 가지 마세요. 특히 밤에는 위험한 곳이니 어른들도 조심하기 바랍니다." 밤에 위험한 곳이라고 하니 나카스 포장마차들만을 구경하고 골목 안으로는 들어가 볼 생각도 못했던 것.
하지만 후쿠오카에 점점 익숙해지고 나니 그곳이 그리 무서운 곳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유흥업소들이 매우 많긴 하지만 그런 곳에 발을 들이진 않을 거고, 맛있는 식당이나 괜찮은 바들도 그쪽에 있기 때문에 자주 들락날락거리게 된 것. 그래서 호텔도 근처로 잡았다.
일단 후쿠오카, 특히 하루요시(春吉) 쪽에 단골집이 많은 지인에게 저녁 먹을 곳을 추천해 달랬더니 알려준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 전문점. 바로 enjoy teppan! TAMI (↗) 매우 깔끔한 실내, 친절한 마스터, 맛있는 음식! 이후 후쿠오카에 갈 때마다 찾는 집이기도 하다.
왠지 대표 메뉴일 것 같은 히로시마 야키를 하나 주문했다. 양이 적지 않아 보여서 추가 주문은 하지 못했다. 난 입이 짧으니까. ㅠㅜ
사케를 추천해달라고 하니 가을이라 그런지 히야요로시를 추천해준다. 히야오로시(ひやおろし)란 숙성이 끝난 뒤 첫 출하된 사케를 말한다. 가을에만 마실 수 있는 별미.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2차 열처리를 하지 않은 것이긴 한데, 뭐 어쨌든 가을이 되면 마시는 술이다. 비슷한 것으로 아키아가리(秋あがり)라는 것이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히야오로시와 아키아가리는 다른 방식(목적?)으로 만든 술을 말하지만, 가을에 출하되는 술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아, 쓸데없는 사족을 하나 더 달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케'라는 단어를 일본에서 사용하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사케(酒)는 '술'을 통틀어서 말하는 단어이기 때문. 쌀을 발효시켜 만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케를 마시고 싶다면 니혼슈(日本酒)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 쌀을 증류한 것은 소주라고 말해도 된다. 정확한 일본어 발음은 쇼츄(しょうちゅう).
후쿠오카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는다고 하니 페이스북을 통해 지인의 부탁이 접수됐다. 꼭 호운테이(宝雲亭 ↗)에 가서 맥주 한 잔 마셔달라는 거다. 사진을 보며 대신 만족하겠다고. 지인들의 여행기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집이라 호기심이 발동해서 들렀다. TAMI는 하루요시에, 호운테이는 나카스에 있는 가게. 이름만 들으면 엄청 멀어 보이지만 강만 건너면 다 거기가 거기인 동네들.
간단하게 하이볼 한 잔과 군만두를 주문했다. 오른쪽 위에 보이는 건 기본 안주 같은 것. 이곳은 역시 한국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곳 다웠다. 곳곳에서 한국어가 들린다. 나는 현지인 인척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의 술과 음식에 집중해보... 지만 오랜만에 한국어를 들으니 자꾸 귀가 그쪽으로 쫑긋!
남자는 굳이 여기서 더 먹어야 되느냐며 가게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친데, 여자는 여기 유명한 곳이라면서 만두만 먹지 말고 다른 음식도 더 먹어보자고 한다.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역시 여기 오길 잘했다며 음식에 대해 극찬을 한다.
흠... 솔직히 말하자면 분위기도 좋고, 음식도 좋고, 가격도 저렴해서 좋긴 한데... 여기만 그런 게 아니다. 어디든 뒷골목에 가면 비슷한 가게들이 많다. 그래서 나라면 굳이 이 가게를 찾지 않을 것 같다. 왜냐면 이미 한국 관광객에게 너무 유명해져서 숨어 있는 뒷골목의 가게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
아, 이제 그만 먹고 호텔로 돌아가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안주 거리를 사다가 남아 있는 아와모리에 소다를 섞어서 선물 받은 시쿠와사를 넣어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발걸음을 패밀리 마트로 옮기다가 '그곳'을 보았다.
지난번 후쿠오카에 왔을 때 '다음에 오면 여기 가봐야지'하고 지도에 저장해놨던 바. 후다닥 핸드폰을 꺼내 구글맵을 열어보니, 맞다. 그 바다. 에잇! 한 잔만 더 하고 호텔로 돌아간다! 입구의 문을 열었다.
가게의 이름은 Bar(バー ↗). 이런 일반명사로 가게 이름을 할 수 있는 건가? 싶지만 어쨌든 그냥 '바'다. 테이블은 없고 바에 대여섯 개의 의자가 전부인 작은 바다. 마스터 한 분이 모두 관리할 수 있는 사이즈. 백발의 마스터가 응대를 해주시는데, 몇 마디 얘기를 해보니 한국말을 한국인 수준으로 잘하신다. 젊을 때 한국에서 사신 적이 있고 최근에도 한국을 많이 오가신다고.
이곳의 좋은 점은 몰트 위스키의 종류가 많고, 저렴하다는 것. 그리고 신선한 시가를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장점 모두 후쿠오카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하신다고. 게다가 한국어를 매우 잘하시는 마스터가 계시니 좀 더 자세한 설명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메리트.
첫 잔을 추천해달라고 얘기했더니 일본의 몰트 위스키인 이치로(Ichiro's Malt - WineWood Reserve)를 추천해주신다. 최근 엄청나게 퀄리티가 좋아지고 있으니 앞으로 비싸질 거라고. 조만간 비싸서 못 마실 술이 될 테니 미리미리 마셔두라고 하신다. 마셔보니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을 듯.
그리고 다음 잔은 '오래된' 것으로 추천을 부탁드리니 시그나토리(Signatory)에서 병입한 링크우드(Linkwood) 1995. 에? 1995라고요? 그럼 엄청 비싼 거 아니예요? 라고 걱정했지만 이내 나의 마음을 읽으시고는 '이거 매우 저렴합니다. 걱정마세요.'라고 하시면서 가격을 알려주시는데 너무 저렴해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역시 '오래된' 술의 뉘앙스를 잘 가지고 있었던 한 잔.
몰트 두 잔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다음에 후쿠오카에 왔을 때 다시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술을 마시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짐을 좀 정리하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버리기엔 아까우니까.
새벽에 배가 고파서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이치란 라멘 본점(一蘭 本社総本店 ↗)에 들렀다. 그동안 관심도 없어서 안 가던 곳인데 눈 앞에 있으니 궁금해졌달까. 나카스에 맛있는 라멘집들이 많은데 굳이 여길 갔을까... ㅠㅜ
주문표를 보면 알겠지만, 맛도 진하고 기름기도 진한 국물로 주문을 했는데... 아, 이게 뭐냐. 카타멘으로 주문을 했는데... 아, 이게 뭐냐. 도대체 면도 국물도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도대체 하카타에 본점을 가진 라멘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관광객의 입맛에 맞춘 이도 저도 아닌 맛. 개성이라곤 볼 수도 없고, 내 나름의 기준에 비추어본다면 하카타 라멘이기를 포기한 맛.
흑. ㅠㅜ 내일은 꼭 맛있는 라멘으로 더럽혀진 입을 씻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