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같은 바다를 따라 달리는 Sea Side Liner
다시 한번 오늘 이후의 코스를 정리해본다. 어젯밤에 뭔가 실수한 것은 없겠지? 나가사키(長崎)는 몇 가지 추억이 있는 곳이라 꼭 들러보고 싶은데, 그러면 구마모토(熊本)로 갈 때 다시 사세보(佐世保) 쪽으로 나와서 구루메(久留米)를 거쳐 빙~~~ 돌아야 한다. 기차 갈아타느라 기다리는 시간 같은 걸 더한다면 네 시간도 넘게 걸릴 거리.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떠올린 코스는 시마바라(島原)에서 배를 타고 구마모토로 넘어가는 것. 약 30분이면 쾌속선을 타고 구마모토로 건너갈 수 있으니 나가사키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직선 코스나 다름없다. 딱히 레일패스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기차'만을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배'를 타면 더 가까운 거리도 있는 거다.
다시 한번 확인해도 이후의 코스는 꽤 마음에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해낸 나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었다. 여행을 하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기분. 어쨌거나 상쾌한 기분으로 호텔을 나섰다. 아침에 부지런히 움직였기 때문인지 렌터카 반납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된 김에 어딘가 드라이브를 다녀오고 싶었다.
어제는 사세보의 남쪽을 돌아다녔으니 북쪽으로 드라이브를 가볼까? 하면서 검색하다가 정한 목적지는 국립 나구시야마 공원(西海国立 長串山公園). 사세보 시내에서 직선으로 북쪽을 향하다가 산을 하나 넘어가면 있는 곳이었는데, 그 '산길'이 너무나 예쁜 길이었다. 혼자 운전하느라 사진을 못 찍은 것이 아쉽다. 쓸데없는 한 마디를 보태자면, 난 아직도, 아무리 오가는 차가 없더라도 주차장이 아닌 길에 차를 세우는 것이 두렵다. -0-
생각보다 잘 관리된 공원이었다고 기억을 떠올리며 검색을 해보니 자그마치 '국립' 공원이었다. 헌데 왜 입장료가 없었지?
아직 오전 열 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어서 여유롭게 산책하며 사진을 찍었다. 멀리 보이는 바다의 색과 조금씩 가을이 될 준비를 하는 나무들. 뭐 그런 것들과 함께 였다고 하면 너무 간지러운 말이려나.
여유로운 산책을 마치고 다시 그 '예쁜 산길'을 반대편으로 돌아 사세보 쪽으로 달렸다. 중간에 잠깐 고속도로를 타야 하는데 코스가 짧아서 그런지 사용료가 무료... 였는데, 아뿔싸 터널을 나오자마자 바로 왼쪽에 출구가 나오는 바람에 출구를 지나치고 말았다. 5분 정도 더 달려서 다음 출구로 나왔더니 고속도로 사용료를 내야 했다. 그리고 빠져나왔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니... 요금이 두 배다. ㅠㅜ
이제 렌터카를 반납해야 할 시간. 반납 장소 바로 옆에 있는 주유소에 들러 '만땅'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만땅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렌터카를 반납할 때 함께 제출해야 하는 서류(?)다. 증명서를 잘 보면 연도가 29년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 적은 게 아니라 2017년이 일본의 연호로 헤이세이(平成) 29년이라서 그렇다. 일본의 젊은 친구들이랑 얘기해보면 자기가 몇 년 생인지도 헷갈려서 계산하며 얘기하던데 이런 공적인(?) 서류(?)에는 연호를 쓰는 게 신기하다.
차를 반납하고 사세보 역으로 가서 나가사키로 가는 기차를 탔다. 지도를 보니 오무라만을 끼고 달리는 기차다. 오른쪽에 앉아야 바다를 볼 수 있는 코스라 재빠르게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사세보 역을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우스텐보스 역(ハウステンボス駅)에 도착했다. 유명한 관광지인데도 이상하게 1도 관심이 없는 곳. 앞으로도 들를 일이 없을 것 같아 멀리서 기념으로 사진만 한 장 찍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오무라만(大村湾)이다. 한참을 바다를 보면서 기차가 달린다. 날씨 때문인지 원래의 바다색인지 별로 아름답지는 않은 바다였지만 그래도 물을 보면서 달리는 기차는 오랜만이다. 어릴 적, 해운대역에서 경주로 올라가는 기차가 바다를 보며 달리는 기차였다. 얼마 전에 해운대에 갔더니 그 철로를 따라 산책을 할 수 있게 해 놓았길래 해맞이 고개까지 걸었던 기억이 났다.
이렇게 사세보에서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Sea Side Liner 라는 기차는 JR 큐슈에서 운행하는 쾌속 열차 중의 하나다. 왜 굳이 운행 회사를 말하냐면, 일본에는 철도를 운영하는 회사가 엄청 많기 때문. 그중에서 JR(Japan Railway)이 가장 크긴 하지만 지역마다 별도의 노선을 운행하는 다양한 지역 회사들이 있다. JR Pass를 사용하는 경우 이런 지역 노선은 무료로 탑승할 수 없다. 회사가 다르니 당연한 일. 또 하나. '쾌속' 열차는 기차의 등급 같은 건데, 가장 비싼 열차는 신칸센이고 그다음으로 특급, 쾌속, 보통 열차 순이다.
약 두 시간쯤 걸려 나가사키 역에 도착했다. 처음 오는 곳이 아니라 왠지 모를 반가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언제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12월 31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던 적이 있었다. 친구와 둘이 카운트다운을 해야 한다며 술 마실 곳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생생했다. 다음 날은 1월 1일이니 신사에 사람이 많을 거라고 구경 가자면서 전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었다. 아, 나가사키 미술관에서 전시를 관람했던 기억도. 어쨌든 추억이 있는 곳이라 느껴지는 친밀함 같은 것을 가지고 나가사키 역에 도착했다.
나가사키 역을 나서는데 '세계 신 3대 야경 나가사키'라고 적힌 플랭카드를 만났다. 이런 걸 볼 때마다 도대체 누가 정하는 건지 궁금하다. 예전에 하코다테(函館)에 갔을 때 그곳은 세계 3대 야경 중 하나라는 광고를 엄청 했었다. 그럼 나머지 두 군데는 어디지? 싶어 검색을 해봤지만 공신력 있는 미디어에서 발표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도시전설처럼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하코다테의 야경은 엄청 아름다웠다. 나가사키의 야경도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꼭 '세계 3대'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광고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어디서 선정하고 발표했는지는 알 수도 없는, 그런 수식어를 말이다.
일단은 숙소인 후지와라 료칸(ふじわら旅館)에 짐을 풀었다. 친절한 주인 아저씨가 사용법을 안내해주셨다. 1층에 식당과 세탁실 등 공용 공간이 있고 2층과 3층으로 남녀가 나뉘어 있다. 내가 예약한 방은 1인실이었다. 욕실과 화장실은 공용. 어차피 숙소에서는 잠만 자면 되는 데다가 내일과 모레는 호텔을 예약해뒀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몇 번이나 타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전차 1일 승차권'을 샀다. 일본에서 전차를 처음 본 것이 나가사키라서 그런지 '나가사키 하면 전차!'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전차 사진이 유난히 많다. 나가사키가 그리 큰 도시가 아니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실제로 전차만 이용해서 대부분의 관광지는 돌아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차 노선표를 좀 볼 줄 알아야 하긴 하는데...
산책도 할 겸 목적지는 구루바엔(グラバー園) 방면으로 잡았다. 역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다. 가을 소풍인지 수학여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도 엄청 많았다. 산책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시카이로(四海樓).
시카이로는 나가사키 짬뽕이 시작된 집으로 유명한 곳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개항한 곳 중의 하나가 나가사키다. 아직도 데지마(出島)에 가면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이 살던 흔적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새로운 지식이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오다 보니 중국에서도 많은 유학생들이 나가사키에 몰려들었는데, 그때 나가사키에서 식당을 하던 한 요리사가 중국 학생들이 싼 값으로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게 해주고 싶다면서 개발한 음식이 바로 나가사키 짬뽕이라고 한다.
그 짬뽕이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고춧가루가 추가되어 빨갛게 변형된 것이 우리 짬뽕의 유래라는 것이 정설.
굳이 점심을 먹으러 이런 유명한 집에 온 이유는... 지난번에 나가사키에 방문했을 때 시카이로가 정기휴무라서 이곳의 짬뽕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들도 참고하시길. 1월 1일에는 문을 닫습니다. ㅠㅜ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아서 나가사키 짬뽕을 작은 걸로 주문했다. 운전을 하지 않으니 맥주도 한 잔. 먹기 직전까지 별 기대는 없었다. 나름 나가사키 짬뽕을 여기저기서 많이 먹어봤으니 대충 어떤 맛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니... 아! 다르다! 맛있다! 고소한 돼지육수와 깔끔한 닭육수가 모두 느껴진다. 야채는 모두 아삭아삭하게 식감이 살아있다. 와, 원조의 맛은 이런 것이구나! 언젠가 많은 사람과 함께 와서 다른 요리들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맛이었다. 완전 대만족.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시작하며 만난 곳은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 일본의 국보이기도 하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가장 먼저 지은 교회라고 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를 사용했다고도 한다.
지난번에 나가사키에 왔을 때 실내를 구경했었기에 굳이 입장료를 내고 내부를 둘러볼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지금은 입장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지난번보다 많이 낡아보이는 외관을 보니 아마 보수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구루바엔(グラバー園)에 올라가 볼까 싶었는데, 입장료를 내야 하기도 하고 지난번에 구석구석 구경했던 곳이라 패스하기로 했다. 흐린 하늘때문일까? 갑자기 커피 생각이 나서 목적지를 변경했다. 천천히 걸어서 나가사키 수변공원(長崎水辺の森公園)을 가로질렀다.
변경한 목적지는 나가사키 현립 미술관(長崎県美術館). 일본의 건축가 쿠마 켄고(隈研吾)가 디자인한 미술관인데 건물이 꽤나 마음에 든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상설전과 특별전을 관람하기도 했고, 이번 특별전은 별로 관심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흐린 하늘 덕분에 커피가, 지친 몸 덕분에 당이 필요했다. 2층에 있는 카페에 앉아 티라미수와 아이스 커피를 주문했다. 이곳과 엮인 추억들이 떠올랐다.
점심과 산책이라는 목적을 모두 달성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중간에 나가사키 역에 있는 도큐핸즈에 들러 손톱깎이를 하나 샀다. 여행이 길어지니 예상하지 못했던 물건들이 필요해진다. 숙소에 돌아와 손톱과 발톱을 깨끗하게 잘랐다.
배가 슬슬 고파지는 시간에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마야(ままや)라고 하는 이자카야를 찾아두었다. 이름도 친근한 데다가 가정요리 이자카야(家庭料理 居酒屋)라고 적혀 있는 것이 기대감을 갖게 했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꽉 차 있었고, 딱 한 자리가 비어서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동네 아저씨들이다. 그렇다면 이 집은 맛집이 분명하다!
추천 요리가 무엇인지 물으니 사바 사시미(고등어 회)를 먹어보라고 하신다. 음? 너무 뻔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접시를 받아보니 처음 보는 비주얼이다. 일단 껍질 쪽이 매우 두껍다. 지방이 가득 찼다는 뜻이렸다. 그리고 껍질 반대편은 뜨거운 물로 살짝 익힌 것 같다. 희한한 비주얼이네? 하면서 한 점 먹어보니, 아! 왜 추천해주셨는지 알겠다. 함께 주문한 아나고 시오야키(붕장어 소금구이)도 쫀득하고 촉촉해서 아주 좋았다.
역시 아저씨들이 바글바글한 집은 맛집이다!
음식이 맛있으니 니혼슈를 한 잔 해야겠다 싶어 주문한 코시노칸바이 준마이긴죠 사이(越乃寒梅 灑). 될 수 있으면 여행하면서 지역 술을 마시려고 노력하는데, 큐슈쪽은 니혼슈보다 소주가 유명한 동네라 니가타의 니혼슈로 주문했다. 오늘은 소주를 마시고 싶은 날은 아니었다.
먹다 보니 아무래도 양이 부족해서 밥과 된장국을 주문했는데 엄청 많은 양을 내주신다. 어라? 이러면 다 못 먹을 수도 있겠는데? 싶었는데, 아뿔싸. 주문해놓고 잊고 있던 고로케가 나왔다. 아, 이러면 다 못 먹지.
술을 다 마시고 남은 음식을 더 이상은 못 먹고 있자니 서비스라며 귤과 녹차를 한 잔 내주신다.
너무 배부르게 먹었더니 도저히 2차를 갈 생각이 들지 않아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소화를 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방에서 차를 내려 마셨다. 방에는 간단한 일본식 다기 세트가 마련되어 있었고, 친절하게 사용법을 설명하는 그림도 있었다.
자, 그럼 내일은 메가네 바시(めがね橋)를 구경하고 시마바라(島原)로 넘어가면 되는 건가? 녹차를 마시며 일정을 정리했다. 구마모토의 호텔도 예약했다. 내일부터는 주말이구나. 여행자에게는 주말이 더 귀찮고 힘든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