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zoos Apr 28. 2020

28. 가을 햇살, 킨린코, 커피 한 잔

2017년 10월 31일. 내 마흔두 번째 생일의 다음 날이자 시월의 마지막 날. 여행을 떠나 온 지 열아흐레가 지난 날. 조식 시간에 맞춰 식당에 내려갔더니 뭔가 엄청 복잡스러운 세팅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조식이다 보니 각각의 양은 많지 않은데 종류가 다양하다고 할까?


테이블 세팅은 정신없지만 깔끔한 맛의 조식


자리에 앉고 나니 따끈한 밥과 국을 가져다준다. 어제 저녁과 비슷한 느낌이다.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흠잡을 건 없는데, 인상적이라거나 기억에 남는 맛은 아니다. 오히려 료칸 하나무라(はな村)는 직원들의 친절한 서비스가 기억에 남아서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혼자 맞이한 생일을 편하게 지낸 하나무라
산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날씨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간단하게 목욕을 한 다음 체크아웃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모지코(門司港)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유후인에는 가을이 한창이었고, 마침 오늘은 맑게 갠 파란 하늘이 산책을 좀 해 보라고 꼬드기고 있었다.


유후인은 단풍이 한창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다.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긴 했지만 그리 힘들진 않았다. 유후인의 골목골목에서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왔던 때의 추억들이 얼핏얼핏 비쳤다. 아, 말이 통하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빌렸다는 대여점이 저곳이겠구나. 이 집의 소프트콘을 함께 먹었었지. 벌꿀을 뿌리는 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 저 약국의 간판을 보면서 친구가 일본의 약값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었지.


(좌) 그 유명한 금상 고로케 (우) 유후인에 왠 쿠마몬?


날씨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괜히 흐뭇해진 마음으로 걷고 있자니 친구들과 시끌벅적하게 줄 서서 기다리던 금상 고로케 가게도 볼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가게 앞은 한적했다. (위치 링크를 걸기 위해 검색을 해보니 지금은 휴점 중이라고)


물안개일까? 처음 와 본 킨린코


지난번에 왔을 때는 킨린코(金鱗湖)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지도를 보니 조금 걸어가야 하는 것 같아서 굳이 호수를 보러 걷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중론이었기 때문. 이번에는 시간도 많은 데다가, 마침 산책 그 자체가 목적이었고, 추억만 뒤지고 싶진 않아서 킨린코까지 걸었다. 너무 가까워서 '지난번엔 굳이 이걸 안 걸었다고?' 싶을 정도였다. 헌데, 솔직히 뭐... 꼭 봐야 하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


텐조사지키(天井棧敷). 허술하지만 한자 그대로 풀어보면 하늘 우물에 사다리를 편다는 뜻이려나.


호수 자체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지만, 호수 주변에는 분위기가 좋은 카페나 식당들이 많다고 했다. 료칸 매니저에게 커피 마실 곳을 추천받은 곳이 킨린코 바로 옆이었다. 차방 텐조사지키(茶房 天井棧敷)가 바로 그곳.


어디까지가 킨린코의 산책로이고 어디서부터가 카페의 마당인지, 옆 가게와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든 것이 희미했다. 자연스럽게 산책하다가 만난 것 같은 카페. 2층으로 올라가니 실내의 분위기는 세월을 간직한 차분함이 느껴진다. 조용하면서도 묵직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박력 있는 그릇에 담겨있는 무정제 설탕. 예전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고집이 있는 집이구나.


커피도 좋았고, 분위기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창밖으로 그려진 단풍이었다. 아저씨 혼자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사진을 얼마나 찍어댔는지...


아, 좋은 산책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나와서도 근처를 좀 더 돌아다녔다. 단풍이 좋았고, 한적한 호수와 개울이 좋았다. 파란 하늘도 좋았고, 울긋불긋 단풍도 좋았다. 약간은 서늘한 바람과 반짝반짝 느껴지는 따스한 햇볕도 좋았다. 가끔 마주치는 한국 관광객들이 나를 일본인인 줄 알고 거리낌 없이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걸 훔쳐 듣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좋은 산책이었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유후인을 떠난다.


이곳에서 점심까지 먹고 출발하면 모지코에 도착하는 것이 너무 늦어질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 유후인역(由布院駅)에가서 모지코역(門司港駅)까지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한 가지를 물어본다. 오이타(大分)에서 고쿠라(小倉)까지는 특급 열차가 있는데 그걸 타겠냐고. 그래서 탄다고 했다. 그리고 표를 두 장 받았다.


오늘도 기차를 두 번 갈아타야한다.


일본의 아니 JR의 승차권 시스템에 대해서 간단하게만 설명해보자면...


오늘의 경로는 유후인에서 모지코까지다. 중간에 몇 번 갈아타는지, 지정석인지 자유석인지, 신칸센인지 특급인지 그런 건 상관없다. 어쨌든 총 경로가 유후인에서 모지코까지니까 그걸로 표를 하나 끊어준다. 사진에서 보면 위쪽에 들고 있는 표다. 가격은 3,670엔. 이것만 있으면 일반 열차를 이용해서 모지코까지 갈 수 있다.


그리고 오이타에서 고쿠라까지는 특급 소닉 열차를 탈 수 있다. 그래서 자유석으로 표를 끊었다. 사진에서 보면 아래쪽에 들고 있는 표. 가격은 1,230엔.


처음 일본에서 기차를 탈 때 가장 당황했던 것 중의 하나는, 여러 장의 표를 개찰구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많은 건지 당황하면서 역무원을 바라보면 '한꺼번에 다 넣으세요'라고 알려준다. 티켓이 두 장이던 세 장이던 한꺼번에 넣으면 된다. 솔직히 아직도 약간 신기하다.


오이타역에서 도시락을 사려고 돌아보는 중


유후인에서 오이타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역에 도착하니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오이타에서 고쿠라까지는 특급 열차인 데다가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 고쿠라에서 모지코까지는 일반 열차니까 도시락을 먹기엔 불편하거나 눈치가 보여서 아예 먹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도시락을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타역은 굉장히 큰 역이었는데, 유후인에서 기차가 도착하는 플랫폼에서 고쿠라로 가는 기차에 탑승하는 플랫폼까지 이동하는 동안 도시락을 살 수 있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아예 표를 내고 밖으로 나가야 가게들을 만날 수 있는 구조.


어쩔 수 없이 역무원에서 도시락 사러 나가도 되느냐고 물어보니 표는 개찰구에 넣지 말고 자기한테 보여 달라고 한다. 역무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역 안에 도시락 가게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역의 규모가 커서 그런 건지 가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갓을 이용한 김밥이 궁금해서 구매!


오이타에서 고쿠라까지, 특급 소닉. 두 종류의 소닉 중에 이건 시로이(白) 소닉이라고 한다나.


도시락을 사느라 기차를 하나 놓쳤다. 지정석이 아닌 표를 사는 이유는 더 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면에서 더 유연하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좌석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다음 열차를 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놓친 열차를 못 봤으니 알 수 없지만, 마침 들어오는 기차는 시로이(白) 소닉. 특급 소닉 중에서도 하얀 소닉을 그렇게 부른다고 하는데, 뭐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동글동글 귀여워서 좋다. JR 나가사키 본선의 시로이 카모메도 같은 열차라서 가장 익숙한(?) 열차일지도 모르겠다.


갓 김밥이 궁금했지만 그것'만' 먹기엔 재미없을 것 같아서 모둠으로


자리에 앉자마자 도시락을 바로 꺼냈다. 어느새 오후 한 시가 넘었으니 배가 고플 시간이다. 마침 할로윈 기간이라 도시락 포장지도 할로윈. 갓 김밥을 포함해 장어, 새우와 계란, 고등어, 유부초밥 등이 함께 들어 있는 모둠 김밥이다. 아니 사실은 후토마키와 치라시 스시라고 해야 하려나. 어쨌든 그냥 다 김밥이다.


갓을 이용한 음식은 갓김치밖에 모르는데 김밥에 갓을 사용하니 가장 궁금했던 갓 김밥. 갓의 향긋한 쌉쌀함이 느껴지려나? 했는데 간장에 잘 절여서 먹기 편해진 갓은 큰 감흥을 주는 맛은 아니었다. 나머지들도 특별한 감흥은 없는, 말 그대로 나쁘진 않지만 기억에 남지 않는 평범한 수준의 좋은 도시락이었다.


덜커덩. 덜커덩... ... 덜커덩. 덜커덩... ...
고쿠라역에서 모지코역으로 가는 일반 열차로 갈아탄다.


오이타역에서 고쿠라역까지는 한 시간 삼십 분 정도가 걸린다. 이젠 다시 일반 열차로 갈아타는 타이밍. 고쿠라에서 모지코까지는 15분 정도? 매우 가까운 거리. 오래전이긴 하지만 몇 번 다녔던 곳이라 익숙하게 기차를 갈아탔다.


(좌) 종점이라 철로가 끊기는 모지코역 (우) 뭐라고? 모지코 역사가 공사중이라고???


모지코는 나의 '첫' 일본 여행지였다. 해외여행을 별로 다녀보지 못했던 시절 동호회 선배님의 인솔하에 처음으로 여행했던 곳. 그 여행이 마음에 들어서 일본으로 많은 여행을 다녔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와야지! 와야지! 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짐하고 있던 곳. 그리고 그 이유 중의 하나인... 모지코역!!


어? 헌데, 역사가 공사 중이다. 아니! 이게 뭐야! 이 역을 보기 위해서 모지코까지 온 건데!!!


2009년에 찍었던 모지코역. 여행 당시엔 공사중이었고, 이젠 공사가 끝나서 새 모습으로 단장했다고 한다.


모지코역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일본 최초의 역사 건물이라고 한다. 처음 방문했을 때 그런 건 몰랐고, 역사가 예뻐서 좋았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푸른 지붕도 좋았고, 너무 크지 않은 규모의 건물도 좋았고, 역사 앞의 널찍한 광장도 좋았다. 그리고 12월 31일 밤 광장에서 모여 신년 카운트 다운을 했던 기억도 '좋음'에 한몫했을 거다. 물론 저녁노을이 살짝 비칠 때 찍은 위의 사진도 마음에 들었고.


헌데 공사 중이라니!!! 이걸 다시 한번 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래서 검색을 좀 해보니 2012년에 보수 공사를 시작했고, 2019년에 보수공사가 끝날 예정이라고 한다. 방문했던 때가 2017년이니 한창 보수공사 중이었던 거다. 물론 지금은 보수공사가 끝나서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사진으로 보니 예전 모습이 더 좋아 보이는 건... 취향의 문제인가?


어쨌든! 커다란 실망을 안고, 호텔까지 걸었다. 지도를 보니 가까워 보이진 않았지만, 딱히 택시를 탈 만한 거리도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왠지 걷고 싶었다.


이후 모지코 산책은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질 것 같으니 다음 포스팅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