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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늘보 Nov 27. 2022

엄마는 30년간의 일기장을 태워버리셨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삶

엄마는 "그런 거 다 소용없어. 과거에 묶여 살 필요가 없어. 지나간 건 지나간 거야. 그걸로 땡이야. 아무 의미도 없고, 그거 들여다보면서 감성에 젖을 이유도 없어." 라며 아궁이에 일기장을 찢어 넣었다.


부모님은 우리가 독립한 후 다시 두 분이서만 살게 되자 시골에 제2의 신혼집을 차리셨다.

작은 마당이 있고, 조막만 한 텃밭도 있는, 해 질 녘이 아주 근사한 동네에 사신다.

부모님의 집에는 한켠에 사랑방도 마련되어 있는데,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아궁이에 불을 때어서 아랫목에 누워 뜨끈하게 지지는 재미가 쏠쏠한 방이다.

밭에서 난 고구마도 구워 먹고 뒷산에서 난 밤도 구워 먹을 수 있다.


한 달 전, 가을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느껴질 무렵 부모님의 집을 갔다.

사랑방에 불을 때야할 정도로 춥지는 않았지만 도시 생활만 하던 우리에게 아궁이에 불 때는 노동은 아직은 즐겁고 재미있게 느껴져서 괜스레 날씨 핑계를 대며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신문지를 밀어 넣고 불을 붙인 후 종이박스를 찢어 그 위에 얹는다.

그리고 텃밭을 정리하면서 주워온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얹고 제법 불이 붙으면 커다란 장작도 슬쩍 올린다.

말이 쉽지 사실 불 붙이기가 참 어렵다.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 엄마와 엉덩이 붙이고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하고 있는데 불씨가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불이 작아지는 것 같다고 하니 엄마는 옆에 산더미만큼 쌓아둔 박스에 태울 거 있으니 일어나서 좀 가져오라고 했다.

엉덩이만 슬쩍 들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박스 날개를 열어젖히니 박스 안은 세월이 묻어나는 노트들로 빼곡했다.


"이거 엄마 일기장이잖아?"


우리 엄마는 말 그대로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예닐곱 살 무렵 우리 집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을 세다가 100권까지 세고 그 이상은 셀 줄 몰라 포기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은 언제나 입을 쩍 벌리며 "너네 집 도서관이야?" 묻곤 했다.

책 자체가 많기도 했지만 수필부터 전집, 시집, 잡지, 소설, 동화, 정보서, 고전문학, 영어 원서 등 종류가 무척이나 다양했다.

엄마는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일기라는 이름으로 노트에 남겼다. 1980년대의 일기부터 비교적 최근의 일기까지 노트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습한 여름을 나거나, 이삿짐차 안에서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세월의 흔적이 제법 느껴지는 노트들은 엄마의 삶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자서전과 같았다.

엄마는 언제나 몽블랑 만년필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일기를 쓰곤 했다. 해외출장을 자주 다닌 아빠는 늘 면세점에서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 오셨는데, 엄마의 선물은 종종 몽블랑 만년필과 관련된 것들이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나는 항상 엎드려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는 엄마의 등에 기어올라가 누워서 낮잠도 자고 쫑알쫑알 떠들며 엄마의 등에 귀를 대고 엄마의 몸을 통해 울리는 목소리를 신기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기억들이 담긴, 이제는 내게도 너무나 소중해진 그 일기장을 모두 태우기 위해 박스에 넣어둔 것은 가히 충격이었다.

심지어 엄마는 최근 언젠가부터는 일기도 예전처럼 매일 쓰진 않는다고 했다.


다소 충격에 빠져 엉거주춤한 자세에 멈춰있는 내 뒤통수에 대고 엄마는 말했다.


"그런 거 다 소용없어. 과거에 묶여 살 필요가 없어. 지나간 건 지나간 거야. 그걸로 땡이야. 아무 의미도 없고, 그거 들여다보면서 감성에 젖을 이유도 없어."


나는 반문했다. "아니 왜 소용이 없어?! 이게 다 얼마나 귀한 기록들인데..! 할아버지 얘기를 일기에 남겨서 책 한 권 만들고 싶다지 않았어?"

하지만 엄마는 대답했다. "아이고~ 야~ 다 부질없다~"


엄마는 일기장이나 갖고 오라고 재촉했고 내 짧은 판단으로 그나마 의미 있는 내용이 가장 덜 있을 것 같은 해의 일기장을 슥슥 손으로 골라 들고 엄마에게 건넸다.


"진짜 태울 거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이미 일기장을 터프하게 좍좍 찢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궁이로 찢겨 들어간 엄마의 일기장에 난 경악을 금치 못했고 엄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나의 충격이 가시지 않는 것 같아 보이자 엄마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있잖아.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은 잊어버리는 게 더 나은 순간들도 많다? 그때 당시에는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별 거 아닌 게 많거든. 그리고 반대로 그때에는 엄청 신기하고 즐거웠는데 시간이 지나 보면 별 감흥이 없어지기도 하고.. 그게 시간이라는 거야. 근데 이런 거 기록하는 건 당시의 마음이 어쩌어쩌 하니까 꼭 남겨놔야 될 거 같아서 필사적으로 막 쓰잖아. 시간 지나고 보면 아무 의미도 없어. 지나간 거거든 이미. 그때를 떠올려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야. 중요한 건 과거에 내가 이랬지.. 저랬지.. 이랬었지.. 저랬었지.. 이거 생각할 시간에 오늘은 내가 이렇구나. 오늘은 내가 이런 걸 느끼는구나. 에 더 집중하는 거야.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면서 살아야지, 과거에 묶여 있는 건 바보야 바보. 이거 일기장? 뭐 죽을 때 다 갖고 죽을 거야? 아무 의미 없어. 짐이야 짐. 자리만 차지해."


그리고 엄마는 덧붙였다.


"중요한 건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거야. 사실이 어쨌는지 그게 뭐가 중요해. 컴퓨터도 아니고 인간이 왜 그렇게 살아. 기록물 검색해서 뭐 어쩔 건데. 아! 이게 사실이었구나! 깨달으면 어쩔 건데? 진짜 중요한 건 다 내 가슴속에 남아있어. 뭐, 너희 낳았을 때 그날 있었던 일들, 기억들, 내가 잊을까 봐? 일기에 안 쓰면 잊어먹겠냐? 절대 못 잊지. 죽어서도 못 잊지. 내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들인데."


내가 아는 엄마는 내 인생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 중 가장 존경스럽고 가장 씩씩한 사람이다.

가장 순수하면서 동시에 진보적인 사람이다. 엄마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본 적이 없고, 언제나 나이가 더 젊은 나보다 더 앞서 나가는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나의 롤모델임이 자명한 사람이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도 엄마처럼 대단한 사람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은 늘 깨지지가 않는다. 아궁이 앞에서의 시간도 그랬다.


30년의 일기.

아빠와 처음 만나 데이트를 하던 시간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우리를 낳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던 모든 과정들의 일기.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감히 그 귀한 일기장들을 불태워 버릴 생각이나 했을까? 저렇게 아무 미련 없이 손으로 죽죽 찢어 한 줌의 재로 만들 수 있었을까?

꾹꾹 눌러 담은 만년필 자국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 글씨들을 모두 하늘에 날려 보낼 수 있었을까.


나는 생각에 잠겨 말없이 엄마 옆에 앉아 엄마가 죽죽 찢어주는 일기장을 받아 아궁이로 쓱 넣기만 했다.

그 와중에 몇 장은 도저히 불태울 수가 없어서 몰래 옆으로 빼놓은 것을 엄마가 쓱 쳐다보고는 모른 척 가만히 웃으셨다.


남겨두지 말고 태우라고 할까 봐 성급히 "아 이건 내가 가질 거야!" 하니 엄마는 "그래라"하며 웃으셨다.


잘 가, 엄마의 일기장.




노오란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존해 타닥타닥 글을 쓰는 지금

의자 옆에 켜 둔 전기난로가 엉덩이를 따듯하게 덮여주니, 그날 아궁이 앞에서의 대화가 생각나 적어본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에 살라고 습관처럼 말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문득 궁금해지는 밤이다.

과거에 잠식당한 내 삶도, 어쩌면 구원의 손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손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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