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짐 연대기

by 그마시



마음과 몸이 모두 분주했던 연말연초가 어느 정도 지난 휴일, 알람도 맞춰놓지 않고 그동안 밀린 잠을 잤다. 방의 크기에 비해 큰 편인 창문을 통해 햇빛이 방 안으로 내리쬐는 것을 감은 눈으로도 알아챌 정도의 시간이 될 때까지 오래도록 잤다. 해가 중천에 떴으니 일어나야겠는데 별 다른 일정도 없고, 일어날 의욕도 없이 그저 누운 채로 베개에 눈을 비비적거리며 얼마간 뒤척이다 겨우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햇빛이 내리쬐는 방안을 멍하니 바라봤다.


바쁘게 지나갔던 연말연초의 시간들에 비해 그리 어지러운 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동안 닦아내지 못한 먼지나 긴 머리카락들이 방안 구석구석 즐비하게 널려있는 걸 보고 있노라니 "그래, 이런 것 하나 제대로 닦아낼 여력이 나에게 없었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책상 쪽으로 눈을 돌렸다.

책상 위에는 선물 받은 머그잔과 거기에 꽂혀있는 연필, 수채화용 붓, 드로잉용 펜, 읽다 만 책 대여섯 권, 아이패드와 연동해서 쓰려고 산 무선 키보드, 방금 주머니에서 꺼낸 체크카드, 영수증 두어 장, 자꾸만 트는 입술에 바를 립밤과 아파 보이지 않기 위해 얼마 전에 구입한 레드립스틱 같은 것들이 놓여있었다.

책상이 어지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깔끔하지도 않은...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어중간히 단정한 책상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머그잔은 선물 받아두고 잘 쓰지 않게 되었던 것인데 어느 새해, 오랜 시간 내 꿈이었던 그림을 꾸준히 그려보자는 다짐을 하며 수채화 붓이며, 드로잉 펜이며 연필들을 꽂아두는 그림도구꽂이로 잘 쓰고 있으니, 선물해 준 이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꽂아두고서 실제로 붓을 빼들어 그림을 그려본 적이 두어 번 있으려나.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아마 머그잔 안에는 먼지가 한가득 들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쌓여 있는 책들은 그때그때 흥미 있는 주제가 생길 때마다 선물 받거나 직접 산 책들이었는데, 성경책, 고대언어, 신앙서적, 에세이, 인문학 책, 홍차에 관한 책, 그림책에 관한 책 등등…맨 아래에서부터 맨 위까지 내 생각의 흐름들이 보였다. 책이 쌓여있는 순서가 위로 올라올수록 최근의 관심사에 가깝다. 보고 싶을 때 쉽게 집어들 수 있으려면 위쪽에 있어야 하기에 상대적으로 흥미가 줄어든 것은 점점 더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이 책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읽어낸 책이 없다는 사실에 ‘그동안 계속 바빴잖아’라는 핑계를 대고 싶지만 핑계는 핑계고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씁쓸해진다.


또 어젯밤 외투를 벗으면서 외투 주머니에서 꺼낸 체크카드와 영수증 두어 장, 림밤, 립스틱… 사무실에 두고 왔어야 할 체크카드와 영수증은 사실 한두 번 내 책상에 놓인 게 아니다. 못다 한 업무를 집에서도 계속 생각하게 되는 습관처럼 자꾸만 집까지 가지고 오게 된다. 다음날 입을 외투에 넣으려고 눈에 제일 잘 띄는 책상 위에 카드, 영수증과 함께 림밤과 립스틱을 두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천천히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지 하면서 놓인 이유를 떠올리다 보니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이 마치 해마다 하게 되는 새해다짐들을 모아놓은 다짐세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더 잘해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함들이 만들어낸 여러 모양의 다짐들. 이런 다짐들이 자그마한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어느 것 하나 완성되지 못하고 현재진행형인 채로.


해가 지나도 그대로인 나의 다짐들처럼, 지금 내 시간들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해마다 다짐이라는 것을 한다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보자는 마음을 해마다 먹는다는 것.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든 의미 있게 채워보려 애쓴다는 것에 그나마 마음을 쓸어내리게 된다.

올해는 다시 그림을 시작해 볼까, 올해는 저번에 하려던 공부를 위해 조금 더 자주 시간을 내야지… 이런저런 계획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책상 위에 놓인 다짐들을 이루어낼 계획을 세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올해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문득, 내년의 내 책상 위에는 어떤 것들이 놓일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