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것들을 사랑한다. 집 근처 산책로에 늘어선 오래된 벗꽃나무들, 오래 사용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가죽물건이라든지 커피나 홍차 같은 음료들이 겹겹이 묻어 자국이 생긴 나무 테이블이나 컵, 마음에 들어 오래도록 입고 입어서 조금씩 해져가는 옷 같은 것들은 사랑스럽고 애틋하다. 사무실 책상 연필꽂이에 꽂혀있는 가위는 손을 넣는 두 곳 중 한 곳이 부러져서 테이프를 칭칭 감아두었는데 그 이후로 더 마음이 간다. 처음으로 나름 많은 돈을 주고 산 주황-갈색 투톤 외투는 겨울에 사무실 전기난로에 아래쪽 귀퉁이가 녹아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 옷을 샀던 매장에 수선을 부탁했는데, 예쁜 문양의 자수가 놓인 천으로 덧대어 훌륭하게 수선되어 왔고 이제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외투가 되었다. 이렇게 손때가 묻고 나와의 추억이나 이야기가 많이 쌓인 물건들이 많아질수록, 인생의 의미가 하나둘씩 늘어간다.
오래된 것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변해가는 것까지 사랑한다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물건이든 사람이든 한번 세상에 존재하게 되면 그 이후로부터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것이 아니다. 공기와의 접촉이라든지 물리적, 화학적, 관계적인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변화들을 반드시 겪게 된다. 특히 얼굴이나 신체, 마음의 변화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주름이 늘고 상처가 늘어있으며, 몸 관리에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운동이나 시술 같은 것들로 체력을 늘리는 긍정적인 신체적 변화라든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겪는 기쁘고 슬픈 일들로 인한 마음의 변화 같은 여러 의미의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특히 나는 배우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주름들을 보면 왠지 모를 숭고한 기분마저 든다. 배우는 얼굴표정을 다양하게 지을 줄 알아야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들 하는데, 얼굴에 주름이 많다는 것은 물론 노화로 인한 것이지만, 그 사람이 배우로서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는 어떤 지표와도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주름이 많다. 이들은 주름을 펴기 위한 어떤 시술도 받지 않은 것 같다. 셜록을 연기해 유명해진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든지, 타이타닉으로 스타덤에 올라 여러 부침을 겪으며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배우로 성장한 이터널선샤인, 더 리더의 케이트 윈슬렛 같은 배우들의 얼굴주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깊어진 연기를 보게 될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몇 년 전 자격증을 따기 위해 수강하게 된 기초현대미술 실기수업의 과제로 영상을 활용한 작품을 만들어야 했던 때가 있다. 그때의 주제는 ‘나’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나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내세울 것이 딱히 없는 사람이다 보니 무엇을 말해야 할까 엄청 고심을 했었다. 그러다 문득 오른쪽 손등에 생긴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9살 때였나.. 뒤에 앉은 친구가 지우개인지 종이인지를 자르려고 커터칼을 들고 있었는데, 친구를 부르려고 뒤돌다보다가 그 친구 손에 들려진 커터칼을 피하지 못하고 오른쪽 손등에 옅은 상처가 생겼다. 피도 얼마 나지 않아서 곧 다 아물겠거니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 자국이 흉터로 남아있다.
이 흉터와 흉터에 대한 이야기는 나 말고 다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니까 이런 것이야 말로 나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나 말고 다른 이들의 흉터에 대해서도 다루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네다섯 명의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흉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밝고 좋은 면들을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비전이나 즐거웠던 추억들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상처받았던 기억이나 어두운 어떤 면들이야말로 그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흉터나 상처들은 없애야 하거나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평생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보듬고 토닥여주라고 남겨진 표시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망가지는지도 모르고 계속 자신을 괴롭히기만 할 테니까.
오래도록 나와 함께하며 조금씩 해지고 부서지고 닳아진 것들, 얼굴의 주름들, 상처들… 이런 것들이 사랑스럽고 애틋한 것은 어쩌면 이런 것들이 나를 지켜주고 보듬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것들에 담긴 이야기들 추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