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여행하다

경주 여행 이야기

by 그마시

여행은 여행지의 현재를 보는 일이자 여행지의 과거를 보는 일이다. 사람의 일생동안 시간이 써놓은 기록들이 몸과 마음에 남는 것처럼, 공간도 그러하다.

시간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수많은 어제들이 모여 오늘을 만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어떤 장소를 여행할 때 그곳에 대한 옛이야기를 찾아보기를 좋아한다. 옛이야기를 알면 알수록 그곳은 더욱 고유하고 특별한 공간이 된다.


올해 여름은 유독 해가 뜨거웠다. 덥기로 소문난 여느 나라들 못지않게 더운 날씨를 한국에서 경험한 특이한 해였다. 그런 여름날, 나는 경주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가보았던 때 이후로 나의 의지로 경주여행을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밤풍경을 좋아하는 나는, 요즘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경주를 몇 해 전부터 여행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막상 여행을 갈 수 있는 타이밍이 되면 내 만성 게으름이 발목을 잡더니 올해는 드디어 경주땅을 밟았다.


나 같은 뚜벅이 여행자들에게 여행지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곳은 터미널이나 기차역이다. 이른저녁즈음에 도착한 경주역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코레일에서 통일성 있게 만든 디자인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외관이었지만 경주역 여기저기에 적힌 천년고도, 신라, 역사를 품은 도시 같은 단어들이라든지 신라시대의 의복전시 같은 것들이 내가 경주에 왔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화려했던 과거와의 조우, 경주역의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여행에 대한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숙소로 향하는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에 심심치 않게 마주친 외국인노동자들, 숙소 바로 옆 골목에 만들어진 외국인마을은 신라의 흔적을 기대했던 나에게 이곳 또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의 도시일 뿐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설레는 첫인상을 품고 도시에서의 시간여행을 꿈꾸었던 30분… 이 짧은 시간 동안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 허탈했다. 그러나 이왕 경주에 온 이상 그 아름답다던 야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을 툭툭 털어내고 첨성대와 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구경하고 다시 숙소로 왔다. 역시 아름다운 야경이었지만 야경 못지않게 사람도 많이 구경한 밤이었다. 고즈넉한 신라의 달밤을 기대했던 까닭일까. 뭔가 조금 아쉬웠다. 그렇게 조금은 서운한 채로 경주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게으름을 이기고 드디어 오게 된 경주 여행이었기에 전날의 서운함은 잠시 접어두고 낮에 만나는 경주는 어떨지 다시 한번 마음을 열고 길을 나섰다. 맛집을 찾는 것에 그다지 재주가 없는 나이지만, 맛집탐방하는 재미도 여행의 일부이기에 경주에서 유명하다던 육회를 먹으러 황리단길로 향했다. 오픈시간이 되기 10여분 전에 도착한 맛집의 위엄은 대단했다. 땀이 샤워하듯 나는 날씨에도 육회를 먹기 위해 대기석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2,30명은 족히 되었다. 그중에 나 또한 한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이 더운 날 육회하나 맛있게 먹자고 기다리고 있자니 그냥 자리가 있는 아무 식당이나 가버릴까, 그래도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참아야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오픈런을 한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들어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폭염을 견디며 마주한 육회는 이 여행이 꽤 괜찮은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맛있었다. 경주여행의 첫 끼니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더위에 놀란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려 근처 조용한 카페에 들렀다. 2층에 자그마한 기와창문이 있는 카페였는데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한잔 들이켜고 기와창문 너머 하늘을 조용히 바라봤다. 경주의 여름하늘과 고풍스러운 기와지붕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창문에 예쁘게 담겨 있었다. 마치 경주에서의 첫날밤의 서운함을 달래주는 것처럼.

조용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기와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졌으니, 본격적으로 경주여행을 시작했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는 불국사, 석굴암, 감은사지, 문무대왕릉… 많은 곳을 다녔다. 내 발로 찾아온 경주는 천년고도의 도시답게 옛 선조들의 지혜와 문화들을 엿볼 수 있었고 역시 수천 년 전에는 한반도를 호령하는 수도였다는 것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경주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 것은 다른 것에 있었다. 경주에 심긴 고목들의 웅장함, 경주를 둘러싼 산맥들의 용맹한 자태, 유독 짙은 녹음이 드리워진 자연이 그것이었다. 자연에도 연륜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면, 경주의 자연은 말 그대로 천년의 연륜이 담겨 있었다. 경주 땅을 거쳐간 많은 사람들, 시간들 속에서도 수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경주의 흙, 나무, 산, 바다, 돌들이 이 도시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경주의 자연은 그 존재 자체로 경주의 뿌리 깊은 역사를 말해주었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바다용이 되겠다며 바다에 묻힌 문무대왕의 왕릉은 보기 드문 수중릉이다. 그의 묘를 보러 감포 해수욕장에 갔다. 문무대왕릉은 돌로 만들어져 있는데, 오랜 세월 철썩였을 파도에도 여전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무대왕은 가고, 그의 무덤만 남아 그가 있었음을 파도가 그 파도소리에 실어 조용히 읊조리는 듯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동글동글 예쁘게 생긴 몽돌을 두어 개 발견했다. 그 돌을 보자마자,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그에게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잘 닦아 가방에 고이 넣어두었다. 마치 귀한 어떤 것을 발견한 것처럼.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 돌을 만지작 거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돌이 어쩌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갈고 닦여져 지금 나에게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돌을 보고 소중한 이가 떠오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돌이 그 영원 같은 시간을 지나 나에게까지 전해졌듯이 그와의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

말로 담아지지 않는 그 마음이 이 돌에 담겨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나는 경주에서 영원을 발견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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