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리다. 걷다 보니 물기를 머금은 흙냄새, 먼지냄새, 나무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냄새.
투둑투둑 투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가 오기 전에는 항상 이렇게 비 냄새가 먼저 온다.
홍차를 좋아하게 된 것도 맛보다는 향긋함이 먼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차보다는 커피에 대한 접근성과 선호도가 더 높다 보니 나 또한 마실 것을 고를 때 차 종류보다는 커피를 고르는 때가 많았는데, 커피에 있는 카페인으로 나를 각성시키고 싶었던 이유도 한몫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커피에 콜레스테롤을 높이는 성분이 있다는 말을 건너들은 후부터 커피 대신 다른 음료를 마셔볼까 하면서 찾게 된 것이 홍차였다.
친구에게 이제는 커피를 줄이고 홍차를 좀 마셔볼까 한다고 했더니 집에 트와이닝에서 나온 레이디그레이라는 홍차가 있는데 이게 마시기에 좋을 거 같다고 티백 2개를 챙겨주었다.
티백포장을 뜯는 순간, 오렌지향과 베르가못향의 상큼함이 퍼졌다. 그 향을 더 깊숙하게 느끼고 싶어서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레이디 그레이의 상큼함이 온몸에 퍼지는 듯했다. 98도 정도 되는 뜨거운 물에 딱 3분 정도 우려낸 후 이번에도 향부터 맡아보았다. 마른 티백이었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의 은은하고 부드러운 상큼함이었다. 맑고 붉은빛을 띠는 레이디그레이 홍차를 마셔보니 향으로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맛은 아니었지만 리프레시될 만큼의 기분 좋은 정도의 맛을 지니고 있었다.
한 가지 차를 향과 색과 맛 모두를 온전히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리 되었다. 다른 홍차들도 이렇게 매력적일까 궁금해지기도 했고, 몸에도 좋다고 하니 나로서는 더 알아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홍차가 좋아져 3개월 동안 월요일 하루를 온전히 홍차를 배우는 시간으로 채웠다. 홍차수업을 하는 공간은 8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순간부터 과일향, 꽃향, 나무향 같은 에센스오일 향기가 '어서 와, 이제부터 홍차 배울 시간이야' 하고 새콤달콤한 인사를 건넸다. 그 기억이 꽤나 근사했는지 홍차를 생각할 때마다 새콤달콤한 향이 함께 떠오른다.
홍차수업 시간에 홍찻잎이 마른 상태일 때와 젖은 상태일 때, 우려내었을 때의 향을 함께 말해보는 시간에 어떤 수강생이 아쌈이라는 종류의 홍찻잎에서 할머니 집 냄새가 난다고 한 적이 있다. 보통은 음식이나 물건, 자연에서 맡을 수 있는 것을 말하게 되는데 할머니 집 냄새라니... 강사님이 왜 그렇게 느꼈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은 할머니는 거실에서 고추를 말리시곤 했는데, 아쌈 홍찻잎에서 말린 고추 냄새가 나서 할머니 집이 떠올랐다고 했다.
아마 이 친구는 이 홍차를 마실 때마다 할머니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겠지. 홍차를 다 마시고 나면 또 옅어지는 기억 속에 할머니를 잊겠지. 향기가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미해지는 것을 애써 잡으려는 마음이 글이 되고, 향기가 되고, 사진이 되고, 어떤 고유한 물건이 된다.
친구의 생일날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원데이 클래스 향수를 같이 만들러 간 적이 있었다. 수십 가지의 향기를 가지고 내가 원하는 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는데, 향을 만드는 가이드라인은 생각보다 추상적인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 내가 되고 싶은 이미지를 떠올려보고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그것에 어울리는 향기를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가이드를 듣긴 했지만 사실 친구나 나나 어떤 이미지를 딱히 떠올리면서 만들었다기보다 내가 맡았을 때 기분 좋은 향을 만드는 데에 더 중심을 두었던 것 같다. 친구는 다 만들고 보니 집에서 사용하는 섬유유연제 냄새 같아졌다며 역시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게 마음에 드는 듯했고, 나는 리프레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맡으면 싱그러워지는 향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만들고 보니 싱그러운 느낌보다는 조금 화사한 느낌의 향기가 되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향수 만들기 초심자의 들뜬마음을 충분히 반영한 거라며 어설픈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향은 원하는 순간으로 자신을 데려다 놓을 수 있는 마법 같은 것이었다.
이제 곧 비 냄새를 실컷 맡을 수 있는 계절이 온다. 이 계절은 딸기향과 장미, 라일락 향이 지나면 이윽고 온다. 수박향과 참외향기와 함께 온다. 이제 이 계절에 나를 놓아 둘 준비를 해야겠다. 열기에 들뜬 그 향기에 흠뻑 젖어야겠다. 그 어떤 향수보다 더 향기롭겠지. 그리고 선선한 낙엽 냄새에 이 계절은 조금씩 희미해져 갈 것이다. 그러나 이 계절의 기억은 향기에 맺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