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많은 길들을 걷는다. 학교 가는 길, 출퇴근 길, 장 보러 가는 길, 고향집 가는 길, 데이트하러 가는 길, 산책길 같은 그런 길들 말이다.
길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걷기를 가장 좋아한다. 나는 은근히 겁쟁이라서 자전거도 썩 내키지 않고, 운전면허가 있긴 하지만 선뜻 용기 내어 도로를 달릴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거니와, 걷는 것을 좋아하니까 걸을 수 있는 거리,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기꺼이 걷기를 선택한다.
누군가 나에게 왜 걷기가 좋으냐고 물으면 재잘재잘 신나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걸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자전거나 자동차를 타도 물론 저마다의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걷는 것만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이 있다. 땅을 두 발로 디디며 느끼는 리듬감, 풍경들을 천천히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풍경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몇 해 전 평일 근무가 저녁에 끝나는 때가 꽤 있었다. 퇴근시간이 되어 해가 저물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걷기 좋은 어느 날, 무작정 길을 걸었다. 그 맘 때 내 마음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사람들 사이에서 겪는 어려움들로 시끌시끌거렸고,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고 싶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내 앞에 여러 풍경들이 지나갔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풍경들을 보지 못하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때 나는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주일에 이틀밤은 사회복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며 학위와 자격증을 따기 위해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하는 생활을 했다. 그렇게 해서 학위와 자격증을 따고 나면 그것을 가지고 사회복지사로 살아갈 계획이었다.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이 의미 있게 여겨져서 한 선택이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내가 누군가를 도울만큼 강한 사람 인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 항상 웅크리고 있었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 사랑하는 이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다른 사람들과 친밀감을 갖기 두렵게 만들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답이 나지 않는 생각들을 하고 또 하며 걷다 보면 어느덧 집 앞까지 와 있었다. 서교동에서부터 응암동까지 천천히 걸어 약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를 걸었던 날,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그날 이후로, 일주일에 서 너 번은 걸어서 집까지 퇴근을 했다.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며 걷는 퇴근 길이 좋았다. 1시간 30분 동안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걸어서 하는 퇴근길에는 때로는 라디오가 함께했고, 삶의 해답을 찾고 싶어 듣기 시작한 말씀들이 함께했다. 그렇게 여러 날을 똑같은 길을 걸었다.
내 안으로 향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바깥 풍경을 향하게 된 것을 발견한 날, 항상 지나쳤던 그 벚나무가, 물길을 따라 흐르는 한강의 물줄기가 이토록 생명력에 넘치는데도 몰라볼 정도로 내가 내 문제에 너무 갇혀있었다는 걸 깨닫는 동시에 이제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조금은 생겼구나 하는 안도감에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똑같은 길을 걷는데도 날마다 펼쳐지는 풍경이 달랐다. 그 풍경과 함께하는 내 생각과 고민들 역시 날마다 달랐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에 라디오를 들으며 걸었던 길은 내일이라도 좋은 이가 내 곁에 생길 것만 같은 설렘으로 가득했고, 벚나무의 기둥이 마치 보디빌더의 근육들처럼 울끈불끈 했던 어느 여름날 걸으며 들었던 펫 매시니의 기타 연주는 마치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간감이 넘쳤다. 울긋불긋 낙엽이 예쁘게 진 어느 밤, 따뜻한 색의 조명과 어우러져 한껏 그윽해진 길을 걸으며 들었던 말씀은 마음의 곳간에 잘 담겨 풍요로웠고, 하얀 눈이 내려앉아 눈꽃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만들어진 말이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며 뽀득뽀득 눈을 밟으며 걸었던 길은 추위를 조금은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오래된 미놀타 수동카메라를 고향집에서 서울로 가져왔던 밤, 사진연습 삼아 조명이 참 예쁘다 생각했던 카페를 찍으며 빨리 인화해보고 싶어 두근거렸던 날도 있었고, 마음 써서 대했던 누군가가 섭섭하게 해 속상할 때 걸었던 산책로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분수대는 잠시나마 마음을 누그러뜨려주었다.
신기한 것은, 그 길들을 다시 걸을 때 문득 내가 이 자리를 지나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지 하며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 난다는 것이다.
’ 그래, 내가 여기를 지날 때 그 일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 일이 잘 해결되어 지금은 또 다른 게 걱정이구나 ‘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격언이 참 맞는 말이구나 끄덕이게 되면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 적이 있다. 아마도 나는 그곳을 지날 때 이런 생각도 했던 나를 추가하여 떠올리게 되겠지. 그런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 마치 시간여행자라도 된 것 마냥 묘한 기분이 든다.
오래되었지만 날마다 새로운 나의 퇴근길, 나의 산책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런 길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의 말을 지루해하지 않고 오래도록 들어주는 길, 사소한 것 까지도 기억해 주는 길, 매일 새로운 풍경을 선물해 주는 길, 지친 하루에 위로가 되어주는 길,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미래의 나까지도 품어주는 그런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