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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Dec 12. 2020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어둠

<뭉크>그의 절망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

빛이 있기에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어 빛이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늘 삶을 긍정하길 원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저이지만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어둠'이 있습니다. 어떤 날은 그 어둠에 파묻혀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날들이 살다 보면 꽤나 종종 찾아오죠.

가시나무 노래 가사처럼, 저 역시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오늘은 어둠을 얘기해볼까요. 그리고 저는 이 예술가가 생각납니다.


"나는 매일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병과 정신병이었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

-에드바르트 뭉크-


고통과 절망으로 기억되는 화가 뭉크.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의 절규를 기억하죠.

음산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뭉크. 그의 그림이 제 마음속에 어떠한 절절함으로 다가옵니다.


Evening on Karl Johan, 1892


노르웨이 오슬로 빈민촌에서  태어난 뭉크는 군의관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뭉크가 5살 때, 어머니가 동생 잉게를 낳고 나서 얼마 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1877년에는 여동생 소피가 1895년에는 또 다른 동생 안드레아스까지 사망했습니다.


병든 아이, 1885

 

Spring, 1889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소외를 표현하고 있는 절규는 그야말로 삶에 대한 고통을 잘 드러냅니다.

세기말의 분위기 속에서 누구도 표현하지 못했던 깊은 심연의 어둠을 그림으로 그려냈습니다.


절규, 1893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는데 거리와 피오르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쪽으로 태양이 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나는 너무 슬펐습니다. 하늘이 돌연 피처럼 붉게 물들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너무나 초조 해저서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난간에 기대었으며 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처럼 검푸른 피오르드와 거리 위로 낮게 깔린 불타는 듯한 구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두 친구는 잠시 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소스라치게 그 자리에 줄곧 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자연의 날카로운 절규가 대기를 갈기갈기 찢는 것 같이 느꼈습니다.

절규를 그렸을 때의 심정을 기록한 뭉크의 일기입니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는 뭉크가 절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일기를 보기 날카로운 절규 속에서 그 절규를 온몸으로 느끼고 그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를 막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절규라는 작품이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뭉크는 절규를 그리기 전 절망이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절망, 1892


 절망.  이 단어.

1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림. 또는 그런 상태.                 

2  실존 철학에서, 인간이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 상태.        


얼마나 슬픈 단어인지. 제발 아무도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By the Deathbed (Fever)

하지만 뭉크는 늘 자신의 삶은 절망이었다고 얘기합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갑자기 나는 끔찍한 두려움으로 침묵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조물주 앞에 선 내가 영원한 형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그런 두려움이었다.

13살의 뭉크


The wedding of the bohemian, munch seated on the far left, 1925

뭉크의 그림은 결혼식 장면마저도 행복하지 않은 순간으로 그려집니다.

뭉크의 5형제 중 유일하게 결혼을 했던 안드레아마저 1895년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사건이 영향을 미쳐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 같아요.


summer night (inger in the shore), 1889
Woman on the Verandah, 1924


Sister Inger, 1884
nude 1, 1902

뭉크는 여성의 그림, 소녀의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누나와 여동생 소피의 죽음 그리고 남아있던 여동생 로라의 우울증과 정신병.

이것들을 지켜보면서 뭉크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런데 그림을 보고 있으니, 저 쓸쓸하고 고독한 여인의 모습들이 어떤 날의 제 모습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는 사람이나 뜨개질 하는 여인이 있는 실내 정경을 그려서는 안 된다. 숨을 쉬고 느끼며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존재를 그려야 한다

에드바르드 뭉크


좌: 마돈나, 1895 /  우: 흡혈귀, 1893

그리고 뭉크의 첫사랑은 도발적인 유부녀 밀리 톨로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매우 강렬하고 뜨거웠지만 이루질 수 없는 불행한 관계였던 두 사람이었죠.

그녀를 만나는 동안 뭉크는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도발적인 매력에 온전한 사랑을 다 받치지만 그녀로 인해 매우 정신적으로 괴로웠습니다.

이미 어머니와 누나, 여동생의 죽음을 통해 배신과 원망을 가지고 있던 뭉크는 밀리 톨로와의 관계로 인해 더욱더 여성에 대한 불신과 고뇌를 가지게 됩니다.

 

그에게 사랑은 고난이었습니다.

아마도 여자는 뭉크에게 마돈나나 흡혈귀 같은 존재였나 봅니다.


The Day After, 1895


마라의 죽음, 1905


그 후, 1899년 뭉크는 툴라 라르센이라는 상류층 여성과 만나게 됩니다. 뭉크가 예술적으로 인정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툴라 라르센의 계속되는 결혼 요구에 뭉크는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그녀는 뭉크와 헤어질 수 없어 권총을 들고 자살하겠다며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의 총으로 뭉크의 손가락을 쏘는 사건도 발생하게 되었지요.


어둡고 음산한 느낌이 많은 뭉크의 그림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것이겠지요.


칠흑같이 어두웠던 그때의 감정

다시는 빛이 내게는 비추지 않을 것 같은 끝없는 겨울

불안과 고통과 마음속 절절한 절규.

영원히 혼자일 것 같은 불안

언어만으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겪을 고통의 감정을 뭉크는 그림으로 색채로 전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 역시 제가 뭉크의 그림에서 받는 느낌을 글로 적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합니다.

그의 고통이 저에게도 조금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절망, 고독, 죽음으로 대변되는 뭉크의 작품세계.  

그렇지만 그의 작품에도 밝음이 존재할 때도 있습니다.


rain, 1902
View over the Rover at St.Cloud, 1890

화사한 인상주의 작품 같네요.


Red House and Spruces, 1927
starry night, 1922

태어날 때부터 고통과 죽음과 슬픔이 내 옆에 있었다고 고백했던 그.

하지만 저는 그의 작품에서 그에게도 별이 빛나던 밤이, 찬란한 햇빛이 비추던 날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The Sun, 1916

이런 빛 말이에요.


조금씩 하나씩 잇달아 드러나는 바다와 작은 섬들 그리고 절벽들. 나는 그 절벽 들위로 솟아나는 태양을 보았다. 나는 그 태양을 보았다.

에드바르드 뭉크


위의 <The Sun>이라는 작품은, 오슬로 대학의 100주년 기념으로 대강당에 그려진 벽화입니다.


스스로는 죽음의 화가라고 이야기했지만,  스페인 독감이 유럽 전역을 휩쓸며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갈 때도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고독한 그의 삶이었지만, 살아생전에 예술가로서는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지금 얼마나 사랑받는 예술가인지 그가 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지금은 그가 참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스페인 독감 후의 자화상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에서 인체 해부가 중요하게 논의되듯이 여기서는 영혼의 해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영혼의 움직임.. 내가 해야 할 일은 영혼을 연구하는 일, 즉 나 자신을 연구하는 일이다. 나 자신은 영혼의 해부에 사용되는 표본이다.  

에드바르트 뭉크


인간의 영혼을 부단히도 그려내고자 했던 뭉크였습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 르누아르 그림에 검정은 없다. 그림은 기쁨이 넘치고  활기차야 해. 인생 자체가 우울한데, 그림이라도 밝아야 해. 가난, 절망, 죽음, 전쟁.. 난 그런 거 싫다. 비극은 누군가 그리겠지. "


누군가는 어쩌면 뭉크였던 것 같습니다.


제 방에 그림을 한 작품 걸 수 있다면 저는 당연히 밝고 예쁘고 화사한 르누아르의 그림을 걸겠지요.

그럼에도 종종 뭉크의 그림을 꺼내보는 이유는,

그의 그림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여전히 나에게는


내가 이길 수 없는 어둠이

존재하기에.


어차피 이길 수 없어 그런 날에는 그냥 그렇게.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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