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이 온다고 했는데,
올 때쯤이 지난 것 같은데,
올 해에는 첫눈이 조금 늦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 밤 첫눈이 올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내가 보지 못했으면 내 첫눈이 아닌 거예요.)
어른이 되면 무뎌진다고 하지만, 여전히 제 머릿속의 첫눈은 아래 그림처럼 순수하고 예쁜 빛깔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늘 첫눈타령이지요.
그림만큼이나 시를 좋아하는 저는 좋아하는 시가 참 많지만, 정호승 시인의 시는 섬세한 감정의 표현과 마음을 회복시키는 힘이 있어 참으로 좋아합니다.
첫눈을 생각하면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읽어보시면, 미소 짓게 되실걸요.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첫눈 같은 세상,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나도 느껴봤던 그 세상이기도 하죠.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했던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첫눈 같은 세상"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요?
만날 수 없다면,
만날 누군가가 없다면 그래도 괜찮지요, 첫눈은 내년에도 또 오니까.
2008년에 저는 어떤 기회가 있어 스위스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제가 있던 곳에 짐바브웨에서 온 한 친구가 있었어요. 20살의 샘이라는 어린 친구였습니다. 제가 있던 로잔에는 10월 초면 첫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첫눈이 오던 아주 추운 날에 하루 종일 밖에서 들어오지 않는 샘에게 왜 들어오지 않느냐고, 춥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샘이, 태어나서 오늘 눈을 처음 보았다고 말했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에게 눈은 아주 익숙하니까 짐바브웨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는 것도, 샘에게 이 눈이 진짜 '첫눈'이었던 것도 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신선한 충격이 있었죠. 그 기억 때문에 저는 샘이 늘 기억납니다.
TV에서만, 영화에서만 보던 눈을 어른이 되어 처음 보다니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해보면 제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니 무뎌지지 말고, 소중한 첫눈을 기다리며 좀 설레어 보는 것도 하나의 소확행 아닐까요:)
이런 낭만쯤은 가지고 살아야 시도 읽고 그림도 보고 감동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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