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를 풀자꾸나, 론다여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동여매고 大자로 뻗어있다 정신을 차렸다. 멀미로 촉발된 군발두통의 카오스를 약도 없이 극복해낸 것이 자랑스러웠다. 게다가 몹시 배고팠다. 혼자 지내는 게 무척이나 융숭한 숙소의 구석구석을 알차게 이용하려면 냉장고를 채워줘야 할 것 같았다. 창가로 가 빨래들을 착착 털어 널고 숙소를 나선다. 건물 앞에서 살펴보니 숙소를 기준으로 왼편은 주거지역, 오른편은 상업지역이었다. 예고도 없이 맑은 공기가 콧속을 뚫고 폐로 빨려 들어왔다. 정말 깨끗하구나! 비로소 높은 고도에 완벽히 동화됐는지 산책하기 딱 좋은 컨디션이 되었다. 반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살살 부는 바람도 참 좋았다. 얄궂은 몸뚱이는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컨디션이 오르락 내리락이다.
우선 숙소 옆 모퉁이 길에 있던 까르푸 익스프레스로 들어간다. 필요 물품들의 가격을 일단 확인만 해두고 주변 골목을 한 바퀴 돌아봤다. 마드리드를 시작으로 이곳저곳 옮겨가며 생활하고 여행하다 보니 생긴 노하우랄까? 무조건 한 곳에서 장을 보는 것보다는 주변에 가성비 뿜뿜한 간식거리와 편의용품 특히 식료품 전문 판매점을 찾는다. 그렇게 산책하다 보니 마트보다 더욱 저렴하고 신선한 야채, 과일, 하몽, 소시지, 치즈, 향신료 전문점들이 나타난다. 적어도 스페인 권역에서는 큰 마트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게 이번 정리여행 초반부터 얻은 좋은 결론 중 하나다. 론다 역시 마찬가지. 산꼭대기 성곽 안에 조성된 구도심이라 대형마트는 없지만 까르푸 익스프레스와 동네의 크고 작은 슈퍼들, 전문 식재료점이 있었고, 한편으론 몰려드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레스토랑들과 타파스 전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근데 이쯤 되면 이상하다 싶은데?... TV 여행 프로그램과 각종 블로그들에서 아낌없이 찬사를 보낸 론다의 대명사 ‘누에보’ 다리와 ‘투우장’이 보이질 않았다. ‘헤밍웨이 길’로 일컬어지는 공원 산책로도 보이지 않았다. 인생 사진 촬영 명소로 유명한 협곡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며 난 누구? 여긴 어디? ㅠㅠ 즉흥 여행이 좋기는 하다만 이렇게 준비성 없이 마주 할 때의 고단함도 감내해야만 한다. 마치 명동의 축소판 같아 보이던 작은 다운타운을 지나 길을 건너니 여긴 십중팔구 론다의 구시가지와 분리되는 지점이었다. 저 앞에는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는 협택촌(=타운하우스)이 펼쳐져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숙소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 같은 길은 싫으니 옆 골목으로 들어가는 찰나,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진동을 하더니 거짓말처럼 또 뽀라(=추로) 전문점이 눈앞에 나타났다!! 야외 테라스는 만석이지만 일단 무조건 진입 시도. 가게 안 1층 좌석과 바도 만석이다. 점원에게 나 혼자라고 심혈을 기울여 설명하자 2층으로 올라가 보라고 손짓한다. 계단 폭과 넓이가 아주 좁아 한 사람만 오르내릴 수 있었다. 2층 담당 점원이 내가 다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주며 창가 좌석을 가리켰다. 오오, 더 좋지요! 주문은 잠시 뒤에 올라와 받겠다는 뉘앙스의 바디랭귀지를 읽어 내곤 얌전히 앉아 창밖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문한 뽀라와 초콜라떼, 카페꼰레체 영접 완료. (앞서 두 편의 추로와 뽀라 대탐험 글을 올렸으니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다음날과 그다음 날 아침 모두 이 곳, 심지어 같은 좌석에서 모닝 뽀라를 흡입했다는 것은 밝힌다.)
배를 채우고 나니 좀 더 산책할 힘이 생겼다. 아무리 산간지역이라도 해는 밤 8시가 넘어야 떨어질 테니 시간도 많았다. 스마트폰 지도를 열어 나의 위치와 이곳저곳 위치를 파악했다. 우습게도 바로 옆 도보 2~5분 거리에 그 유명한 론다의 협곡과 누에보 다리, 투우장과 공원이 붙어있었다. 그 모든 것을 피해 산책을 한 내가 참 대견할 따름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실로 엄청난 능력 아닌가?! ㅎㅎ. 역시 길치와 방향치의 무계획 여행은 이 맛이라며 정신승리를 챙기곤 다시 길을 나서 누에보 다리로 향했다. 많이 걸을 새도 없이 한 골목만 옮겨왔는데 크와왕!!! 눈앞에 떡하니 협곡이 펼쳐진다. 시야가 트이고 바람이 불었다. 만끽하고 싶지만 멍하게 있으면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물밀듯이 걸어와 나를 다리 난간으로 붙여버렸다. 엄마야!!! 여기서 세상을 하직할 순 없으니 내일 아침, 단체 관광객들보다 먼저 와서 보기로 하고 우선 누에보 다리를 건너 다리 옆 동네를 탐험해 보기로 했다.
기념품 상점들을 걷는데 갑자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얼마 전 마드리드의 한인 민박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였다. 고작 2일 밤만 함께 했기에 통성명까진 못했지만 옆 침대에 머물며 서로를 존중했던 사이였다. 24인치 캐리어의 1/3만 채우고 나머지 공간을 모두 비워 온 현명한 여행자였으며 배우 한효주와 송지효를 한꺼번에 닮은 미인이기도 했다. 해서 ‘여배우’라는 별명을 붙인 그녀였다. 내가 한인 민박을 떠나던 날, ‘여배우’에게 다른 여행객이 내게 주었던 마드리드 교통카드를 물려주었다. 그녀 역시 마드리드를 떠날 때 다른 여행자에게 물려주겠다고 했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무단횡단을 해 반갑게 얼싸안고 안부를 물었다. ‘여배우’는 세비야에서 당일치기로 동행을 구해 론다에 왔고, 돌아가기 위해 터미널로 가던 길에 나를 마주쳤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은 그라나다로 간다고. 세비야와 그라나다는 나에게도 좋은 추억이 가득한 도시였다. 서로의 여정을 응원하며 우리는 다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그녀를 등지고 걷는데 가슴이 벅차올라 뒤돌아 다시 그녀를 보았다. 론다의 광활한 협곡과 누에보 다리를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용감한 여행자가 보였다.
왠지 모르게 눈물 콧물이 날 것만 같던 그때, 파티복을 차려입은 한 가족이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동네 맛집이라도 숨어있나 싶어 그들을 몰래 뒤따랐다. 살짝 오르막길을 오르더니 중앙이 뻥 뚫린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론다의 마을 성당과 그 앞마당 같은 공간이었다. 노천카페와 종교용품 판매점, 마을 성당과 작은 주차장이 있었다. 관광객은 한 명도 없는 한적한 공간에 쾌재를 부르며 커피라도 한 잔 마실까 싶었으나 파티복을 입은 또 다른 사람들이 자꾸 보인다.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호기심에 이번에도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어머나, 결혼식이었구나!! 마침 신랑과 신부가 예배당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 많은 지인들이 축하하며 예배당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마음속으로 그들을 축하했다. 나에게 이런 광경을 보여준 론다의 사람들에게도 고마웠다. 하객들은 총천연색 의상을 멋지게도 차려입었다. 말 그대로 동네잔치였다. 우리네 결혼식에선 신부보다 튀면 안 된다는 인식 때문에 남녀 모두 무채색 들러리가 되고 마는데, 적어도 이 곳에선 아무도 그런 점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화려한 화장과 머리 손질, 완전 새빨강은 물론 공작새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패턴의 의상들과 손에 든 술잔까지. 여기저기 오랜만에 본 친구들은 안부를 나누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겼다. 신랑 신부를 보지 않는다고 눈치도 안 준다. 한쪽에선 덩실덩실 춤도 춘다. 괜시리 신난 나도 맨 뒷 꽁무니에 서서 그들을 보며 움찔움찔 스텝을 밟는다. 아아, 파티로구나!!
한참을 구경하다 숙소로 향한다. 다시 누에보 다리를 건너며 천 길 낭떠러지의 협곡도 내려다본다. ‘여배우’가 힘차게 걸어갔던 길도 보인다. 숙소 근처 과일 가게에서 커다란 멜론 반 통을, 슈퍼에서 생 소시지와 토마토, 인스턴트 양파수프를 샀다. 숙소로 돌아와 한 숨 돌리며 큰 방 베란다로 나가 본다. 시에라 산맥에 걸린 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아직 오후 9시 전이다.
아프다고 징징대서 미안해 론다야.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
아, 빨래 걷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