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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Mar 04. 2017

다시 BORN '라라랜드'

라라랜드와 로스앤젤레스

2016년 12월 처음 <라라랜드>를 관람하고,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먼 훗날이라 생각하여 잠시 필자의 마음속 서랍장 속에 고이 접어 넣어두었다. 아직 그 서랍장에 거미줄이 치기도 전에 우연한 기회로 3개월 만에 다시 펼쳐보게 된 <라라랜드>는 오랜만에 만나는 하지만 익숙함 가득한 연인이 아니었다. 다시금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하는 그녀 혹은 그였다. 좋은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 기대감 가득 앉고 보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첫 느낌보다 그 여흥이 감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체념하게 되는데, 왜 이 영화의 경이로움은 다시 볼 때 더 배가 되는 것인가?


할리우드가 위치해 있는 LA, 로스앤젤레스를 일찍이 사람들은 LA LA LAND(라라랜드)라고 부르곤 했다. 아마도 그곳이 주는 동화 같은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곳을 지칭함에도 표현에 따라 느껴지는 감흥이 다르다. 라라랜드는 낭만적이고, 로스앤젤레스는 도시적이다. 라라랜드는 감성 돋는데, LA는 차갑기만 하다. 무엇보다 일단 우리는 '랜드'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왠지 마음이 넘실넘실 설레지 아니한가? 할리우드는 꿈의 공장이라 지칭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에 입성하기 위해선 LA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한편을 갖다 바쳐야 한다. 대단히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오스카 보수주의자들의 원칙 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전작 <위플래쉬>에서 양립할 수 없는 가치관들의 아이러니에 대해 끝내주게 설파했던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신작이다.


'라라랜드(LA LA LAND, 2016년 作)'




교과서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부지런한 개미는 겨울을 풍요롭게 보내고, 게으른 베짱이는 그 겨울이 너무 추웠습니다.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잡았네요. 아프니까 청춘입니다.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매시 매분 매초 변하고 있다. 부지런했던 개미는 매일 12시간씩 고되게 일하며 수도권에 겨우 집을 마련했고, 놀면서 바이올린만 연주하던 베짱이는 한류스타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다. 일찍 일어난 부지런한 벌레는 가장 먼저 새의 먹잇감이 되었으며, 예능<SNL>에서 유병재가 외친 '아프면 환자지, 뭔 청춘이야!'라는 포효의 영상은 여전히 웃기면서도 가슴을 치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사랑과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 보았다. 그것은 현실세계에서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라라랜드>의 두 주인공 세바스찬과 미아도 여느 로맨틱 코미디 같은 만남을 시작한다. 아마도 그들은 애초에 사랑과 성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영화는 미묘한 그들의 첫 번째 감정선을 낭만이 흘러넘치는 연보랏빛 매직타임의 뮤지컬로 승화시키면서도 그들이 현실로 돌아온 순간은 굳이 그들의 입으로 '별로네'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영화의 후반 미아의 기적 같은 오디션을 마친 순간 재방송된다.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 걸까?', '흘러가는 데로 있어 보자.', '여기 정말 별로네'. 관객들은 그간 수많은 영화로 학습 받아온 기대 심리라는 것이 있다. 세바스찬이 미아의 고향까지 찾아와서 그녀를 끌고 왔고, 그녀가 일생일대의 오디션까지 보게 됐으면 그들의 사랑은 단단해지고, 미아는 대배우가 되어야 하며, 세바스찬은 자신의 멋들어진 재즈 바 사장이 된 후 그들은 결혼해 알콩달콩 행복해야만 한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강렬하다. "이제 보실 영화는 뮤지컬입니다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듯 멋들어진 롱테이크(실제는 아니다)의 고속도로 로망스로 시작된다. 실제 LA의 고속도로에서 허가받은 구역만 막고 며칠에 걸쳐 제한시간 내에 촬영했다고 한다. 분명 그들의 공연 순간은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는 순간 이곳은 잽싸게 수많은 장비며, 수많은 인원들이 빠져나가야 되는 아수라장의 현실이 되고 만다. 이 고속도로 군무가 끝나면 시작되는 꽉 막힌 도로의 경적소리도 마찬가지. <라라랜드>는 교집합이라는 없는 것들의 이야기이다. 이 강렬한 카타르시스 뒤에 오는 답답함은 결국 성공과 사랑 성취라는 두 가치가 달리는 평행선과 같은 맥락으로도 보인다. LA 중에서도 할리우드가 배경인 이 영화가 화려한 미장센 이면의 현실적인 세트장을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카메라였다. 광각렌즈를 주로 사용해 전체가 약간 불룩하게 보이는 화면은 공간의 판타지스러움을 더하게 되고, 시네마스코프의 널찍함은 시각적 체험은 즐겁게 하면서도 프레임 가운데에 위치한 미아와 세바스찬을 더욱 외로워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미아를 연기한 엠마 스톤은 다채로운 표정연기를 보이며, 본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는 것 같은 사랑해주고 싶은 여인의 연기로 시종일관 관객을 행복하게 하고(그녀는 결국 오스카를 손에 쥐었다), 세바스찬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은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디테일한 표현력으로 강렬함보단 차분하게 관객의 마음속으로 짙게 스며든다. 정중앙 내려온 머리카락 몇 가닥까지도 연기에 참여해 그의 분위기를 잡아내기 시작한다. <위플래쉬>에서 광기 어리게 재즈에 집착했던 플랫처 교수 역의 J.K 시몬스가 재즈 문외한 레스토랑 매니저로 등장하는 것은 소소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이유 없는 반항>이 상영되던 극장은 결국 문을 닫기에 이르고, Light House 재즈카페에서 전통재즈에 몸을 흔드는 사람들은 장년기에 접어든 옛사람들 뿐이며, 그룹 메신저스(MESSENGERS)의 재즈는 기계음과 섞여야 젊은이들을 춤추게 만든다. <카사블랑카>에 대한 언급과 극장에서 그녀를 찾기 위해 이마에 손을 올리고 두리번 거리는 세바스찬의 제스처는 뮤지컬 영화임을 넘어 무성영화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왠지 <라라랜드> 속 겹겹이 놓여있는 옛것에 대한 향수는 거침없이 변해가기만 하는 것들에 대한 감독의 상념을 나열한 것만 같다. 영화가 끝나면서 등장하는 THE END의 글씨체가 참으로 클래식하지. 이 지점이 필자가 서두에 언급한 경이로움의 이유일 것이다. "훌륭한 감독은 유성영화를 무성영화처럼 찍는다고 했던가?" <라라랜드>가 선택한 고색창연함이 필자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원래 고전의 좋은 점은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깊어지는데 있는 것 아니겠는가.


<위플래쉬>에서 이미 감독이 얼마나 음악에 전문가인지는 증명된 바, <라라랜드>의 편집도 드럼을 연주하듯 유려하고 리드미컬하다. 미아가 일하는 카페의 설정 쇼트들이 삼박자를 이루면서 운율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은 예 중 하나이다. 드럼은 그 밴드의 가장 기본리듬을 만들어내는 악기이니 말이다.


자신들의 꿈에 손을 뻗을수록 점점 멀리 떠나버리는 것만 같을 때 즈음, 그들의 사랑도 서서히 식어간다. 세바스찬이 준비한 깜짝 저녁식사를 하며 꿈과 현실에 대한 괴리로 언쟁을 벌이는 그들의 모습은 그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다소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느껴지지만, 환상의 마지막 시퀀스를 목도하면서 약간의 불만은 눈 녹듯 사라진다. 감독은 원래 <라라랜드>를 먼저 연출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인감독에게 절대 이 정도의 투자는 힘들기에 상대적으로 저예산인 <위플래쉬>를 만들어 자신의 입지를 구축했다고 한다. 이 마지막 시퀀스는 그런 그의 열망이 폭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세바스찬은 결국 재즈 바 '셉스'를 운영하며 꿈을 이룬다. 미아는 결국 최고의 여배우가 되어 꿈을 이룬다. 둘은 꿈을 이루지만 사랑을 놓친다. 함께 파리로 건너가 사랑을 유지할 수도 있었겠지. 그 아이가 미아와 세바스찬의 아이 일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랬으면 그들의 꿈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왠지 이 마지막 공연은 꿈을 쟁취하고 사랑은 놓친 자들을 위한 위로처럼 느껴져 왠지 마음을 애잔하게 만들기도 한다.


두 남녀는 환상의 라라랜드에서 3계절을 함께하고, 현실의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지막 계절을 맞닥뜨린다.


필자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준 별 4개에 별점 반개를 추가한다. 감독상은 거머쥐었지만 말도 안 되는 해프닝으로 아쉽게 작품상을 놓친 감독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 (별 4개 반)

환상의 라라랜드에서 함께한 3계절, 현실의 로스앤젤레스에서 맞닥뜨린 마지막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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