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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an 30. 2017

다시 BORN '아메리칸 뷰티'

정중동, 동중정


허영만 화백의 <타짜>에서 남자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지 않고는 못 베길 아리따운 여자가 침대에 나체로 누워있는 모습을 한 송이 장미꽃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강렬한 꽃송이와 서슬 퍼런 가시. 결국 그 남자는 그녀와 뜨거운 하룻밤의 쾌락을 보냈지만 훗날 임질에 걸린 것으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적색이 주는 강렬함과 충동 적임 그리고 쾌락. 하지만 그 뒤에 오는 한시성, 허무함 그리고 공허함까지. 결국 이 영화는 빨강이 주는 양가적인 것들에 대하여 고찰해보고 있다. 그 가족의 집의 문은 빨간색이다. 그가 풋사랑에 빠진 딸의 친구는 시시각각 붉은 장미잎으로 묘사되어 보는 관객의 심장까지도 두근거리게 만든다. 마지막 그의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도 지독히 붉은 선혈이었다.


아 이 왜곡된 세상이여,

아 이 눈칫밥 먹는 인간들이여,


<아메리칸 뷰티>라니 제목에서 풍겨오는 해학적인 스멜. 20세기 끝자락 급속도로 진행되는 현대화 속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샘 멘데스 감독의 개탄이리라. (물론 약 16년이 지난 지금,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지지는 않았다.). 영화는 미국 어느 마을의 전경을 부감으로 훑으며 레스트 번햄을 연기한 케빈 스페이시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2000년 作)'



데이빗 린치의 <블루 벨벳>이 1986년에 커튼 뒤에 숨어서 교외 주택가의 삶을 엿보았다면 13년 후 샘 멘데스의 <아메리칸 뷰티>는 창틀에서 커튼을 모조리 뜯어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어리둥절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정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의 책에서 이 영화에 대해 작고한 문장이다. 서두에 언급한 부감 속에 겹겹이 솟아있는 주택들 그중 불특정한 한 곳에서 발생하는 이 영화의 해프닝은 어느 집, 어느 가정에서 벌어진다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NORMAL, ORDINARY 한 미국의 여느 집 말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 청진기를 갖다 대보자. 늘 무기력하고 권위 없는 가장의 모습을 보라. 축 늘어진 뱃살의 소유자 레스트 번햄의 하루 중 유일한 유희의 시간은 모닝 샤워를 하며 자신의 중심을 거세게 흔드는 순간이다. 현자 타임 이후 더욱더 무력감에 휩싸인 채로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간다.


아네트 베닝이 연기한 그의 부인 캐롤린 번햄은? 시종일관 자신을 마인드컨트롤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오늘은 잘 될 거야!'라는 긍정의 희망고문으로 늘 자신을 채찍질한다. 보는 사람 하나 없지만 그녀는 늘 신경질적일 정도로 포효해댄다. 고단한 하루의 끝자락 결국 터져 나오는 눈물도 그녀에게는 못마땅한 일이며, 자신을 채근하기에 이른다.


도라 버치가 연기한 그들의 딸 제인 번햄. 이런 환경에 어찌 그녀는 자연스러울 수 있겠는가?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부모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고 그저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 지리멸렬한 캐릭터들과 인물관계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은 저녁식사 장면이다. 일단 널찍한 책상 양쪽에 자리 잡은 부부의 구도부터 그들의 정서적 거리감을 보여주기에 이르고 그것을 광각렌즈로 촬영하여 실제보다도 더욱 폭을 넓혀 놓았다. 억지로 틀어놔 기묘하기 채우는 클래식 음악은 왠지 불안불안하기만 하다. 이 장면은 부엌 바깥에서 그들을 관찰하듯이 촬영되었는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레스트 번햄의 스탠스 변모에 따라 점점 부엌 안으로 카메라가 들어간다. 그들의 가면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는 것처럼. Anyway 이 장면의 미장센은 부자연스러움의 집합체인 것은 분명하다.


언급했듯 번햄가처럼 균열이 생긴 가정의 모습은 수만 가지 중 하나의 경우의 수일뿐이다. 카메라의 각도를 조금만 돌려 그들의 이웃을 바라보자. 전직 해병대 간부였던 남자는 늘 자신이 군인이었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자신의 마초 적임을 항상 강조하는 그는 게이에게 환멸을 느끼는듯하지만 사실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그가 쏜 화살은 그 자신에게로 향해있다. 장진 감독의 영화 <하이힐>에서 나온 대사처럼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해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 상처를 꽁꽁 싸매어 감추기 위해 더욱더 과시적으로 남성성을 강조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의 원인은 타인의 눈이다. 우리는 사실 남들의 시선과 눈치 속에서 어떻게 보이느냐에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부, 명예, 사회적 지위, 외면 등등 순수했던 시절의 자연스러움은 잊은지 오래고, 가수 김현식의 <우리네 인생>의 한 구절처럼 흘러가는 대로 흐르는 대로의 미학은 찾기 힘든 시대에 도달했다. 심지어 자신의 성(性)에 대하여서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시대 말이다.


다시 돌아와 그것은 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이 작다는 콤플렉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있는지 없는지 명확하지 않은 남들의 시선이라는 벽 속에 혼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말이지.


무엇보다 마지막 안젤라 역의 미나 수바리의 진실을 목도하는 순간 우리는 기분 좋은 뒤통수를 후려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진다. 자신이 섹스 심벌임을 강조하기 위해 온갖 거짓으로 자신을 얼룩지게 하던 그녀의 모습에서 말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어긋나버린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조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겠는가?


잔디에 누워 바라보는 별똥별, 집 앞 도로에 늘어선 노란 빛깔의 단풍잎, 메마른 종이 같던 할머니의 손과 살결, 사촌 토니의 신형 화이트 버드를 처음 구경한 순간, 그리고 소중한 가족. 순간의 쾌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가슴이 한없이 부풀어 오르게 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세상 곳곳에 놓여있다. 장미의 강렬함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휘날리는 비닐봉지에서 느낄 수 있는 바람의 아름다움, 여백의 미, 정중동, 동중정 이라고나 할까? 세월에 치여, 사회적 요구에 의해, 주변의 시선에 의해, 자기 자신을 잃고 보여주기식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영화이다. '세상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많으니 그 뷰티(Beauty)를 늦기 전에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분명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인생은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강렬한 적색의 아름다움을 한 번쯤은 느끼고 싶긴 하다.


★★★★ (별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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