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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Apr 16. 2017

다시 BORN '아비정전'

홍콩의 낭만은 영원하리!

먼저 작업 걸 때는 언제인 양 차갑게 돌아서는 남자가 있다. 이에 끝내 삭히고 혼자 견뎌내는 여자도 있고, 일찌감치 어느 정도 포기하고 끝까지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도 있다. 반대로 어떤 관계에서는 남자가 저자세로 나온다. 자신의 자동차까지 팔아버린 돈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노잣돈을 쥐여준다. 속도 없는 듯이 말이다. 민숭민숭,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잔잔한 인연도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언급한 것들은 이 영화에 나오는 5남녀(장국영, 장만옥, 유가령, 유덕화, 장학우) 사이의 얽히고설켜있는 관계를 말해 본 것이다.


이 영화는 극 중 인물들의 내레이션이 이어지고, 그 내레이션의 주체는 위의 5명의 인물 사이를 유영한다. 그렇다. 한 명 한 명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개개인의 사정이 다르고 순간을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인간의 관계 중, 그중에서도 남녀의 관계는 이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대성'이라는 속성은 '시간'이라는 놈한테는 더욱더 꼭 들어맞는다. 제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일지라도 어떤 순간들은 죽기 직전까지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특히나 왕가위 감독에게는 이 영화를 만든 1990년은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나 보다. 영화의 시작부터 '째깍째깍' 시계 소리를 들려주더니 결국 시계를 보여주고 마침내는 장국영의 입으로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을 기억할 것'이라는 시간에 대한 대사까지 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1990년. 영국의 식민지 생활을 벗어나고 중국에 반환되기 7년 남짓 남은 홍콩.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 영화의 영어 제목이 Days Of Being Wild인 것처럼 <아비정전>은 5남녀의 이상한 연애 영화이기도 하지만,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텅 빈 분위기를 자아내며 그 알싸한 감정들을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는다. 그런 연유일까? 장국영을 둘러싼 장만옥, 유가령의 사랑 노름이 괜스레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 1990년 作)'




맘보 버전 <MARIA ELENA>. 멋들어지게 넘긴 올백머리, 왜소한 듯 강단 있는 몸매. 거울을 보던 아비(장국영)은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사뿐사뿐 절제의 댄스를 시작한다. 이동진 평론가는 장국영이 잘하는 연기 중 하나가 바람기 있는 남자라고 했던 바 <아비정전> 속 장국영은 어느 각도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도 완벽하다. 한 프레임 속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곳을 본인의 매력적인 분위기로 채워 놓기 시작한다. 어느덧 그는 특급 남자배우들에게서만 나오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마치 임재범, 전인권 등의 레전드 보컬들의 음악을 들을 때 그들의 음이 탈마저도 또 하나의 음표가 되는 것처럼 그에게서 퍼져 나오는 후광마저도 연기가 되고, 영화의 미장센이 된다.


그는 홍콩과 닮아있다. 당신들의 낮보다 우리들의 밤은 길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낭만의 홍콩 말이다. 이 '낭만'이라는 놈은 사실 이 영화의 전체 스타일과도 맞닿아 있는데, 중간중간 흘러나오는 소주 한 잔 생각나는 음악과 분위기. 필리핀의 야자수를 보여주는 나른한 쇼트. 장대비 쏟아지는 날 비어있는 공중전화박스 하나 놓여있는 쇼트 등. 왕가위 감독의 눈에 비치는 1960년대(아비정전의 배경은 1960~1961년이다) 의 홍콩은 이런 아련한 느낌이었지 않을까? 이런 분위기는 후반부 미학의 끝을 보여주는 롱테이크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필리핀에서 장국영과 유덕화가 여권을 구하기 위해 발걸음 한 어느 허름한 식당 장면. 드론 카메라로 계단을 올라와 그 카메라의 동선이 약속한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음악 리듬에 맞춰 장국영은 춤을 추는 듯 무방하기 시작한다. 이 전체 시퀀스는 하나의 맘보 공연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아! 우리가 보는 영화는 왕가위 영화였지!' 다시 한번 탄복하는 순간이다.


 

발 없는 새가 있다. 그 새는 평생을 날아다닌다. 그 새가 잠시 쉬로 땅으로 내려오는 순간은 자신이 죽는 순간이다. 아니 어쩌면 그 새는 이미 죽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새는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아비 본인이다. 그리고 그 새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홍콩이다.


장국영과 유덕화는 잊지 못하는 순간도 모두 잊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기억이 좋지 못하니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잊고 싶은 것 아닐까? 좋은 기억을 잊지 않을 수 있고, 나쁜 기억을 잊을 수 없는 것. 이것이 시간의 힘이고 반대로 시간의 비극이다. <아비정전>은 이렇게 처연하면서도 낭만이 흘러넘치고,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기운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엔딩에 다다른다.


이 영화의 엔딩을 필자는 상당히 좋아한다. 뜬금없이 양조위가 등장해 한껏 허세스럽게 멋을 내는 그 장면 말이다. 원래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이 2부로 기획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조위는 2부의 주인공으로 출연 예정이었다. 하지만 여러 이해관계로 2부 제작이 무산되게 되어 맥락에 안 맞는 결말이 나왔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단칸방에 살며 쥐뿔도 없어 보이지만 '간지'만큼은 여전히 형형이 빛나고 있는 영원한 홍콩의 낭만이 어른거린다.


★★★☆ (별 3개 반)

홍콩의 낭만은 영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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