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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May 05. 2017

다시 BORN '좋은 친구들'

열등감과 우월감에 사로잡힌 우리를 조롱하려는 듯


<좋은 친구들>, 영문으로 <GoodFellas>. 제목에서부터 역설적인 물성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러니까 레이 리오타가 연기한 헨리 힐, 조 페시가 연기한 토미 드비토 그리고 대배우 로버트 드 니로 가 연기한 지미 콘웨이까지, 세 명의 우정은 톡하면 완전히 으스러져버릴(장장 146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사상누각의 관계라는 말이다. 이런 관계는 영화의 중간중간 관객들에게 가시화되는데, 당장 떠오르는 두 개의 시퀀스를 언급해 본다. 영화의 초반 토미는 헨리에게 술집에서 농담을 던지다가 갑자기 뭐가 웃기냐며 태세 전환을 보이는데, 그 갑작스러움은 기묘한 서스펜스를 선사하며 둘의 관계를 안온하게만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다른 하나는 영화의 후반인데, 토미가 결국 살해당했다는 전화를 받은 지미가 공중전화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이 눈물은 분명 악어의 눈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료애의 어떤 것은 더더욱 아니었고 단지 자신의 마피아 세계에 대한 연줄이 끊어졌다는 데에서 오는 비정한 눈물로 비치기에 이른다.


할리우드 영화계의 3대 거장(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콜세지) 중 한 명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것이 인간 자체이든, 시스템 속에 있는 인간이라는 확장된 의미이든, 그의 영화를 보면 왜 '그'가 그렇게 되었는가?를 한 번쯤 곱씹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좋은 친구들>은 1955년에서 1980년까지 뉴욕 브루클린을 시작으로 플로리다까지 어쩌면 지금의 미국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조했다고 봐도 무방한 마피아들에게 망원경을 들이대면서 시작된다.


'좋은 친구들(GoodFellas, 1990년 作)'




'마틴 스콜세지의 카메라 기법은 예술적이라는 표현보다는 기술적, 교과서적이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라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가수로 치면 김연우 같다고 할까? 예상치 못하게 소울을 가져다주는 감성은 부족하지만 음정, 박자 등 기법적인 요소 뭐하나 놓치거나 틀리는 지점이 없는 가창력 면에서는 최고인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쇼트/역 쇼트 기법의 교과서라고 말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헨리의 부인 카렌이 침대에서 자고 있는 헨리의 위에 올라타 총구를 들이대고 있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헨리의 시점 쇼트, 카렌의 시점 쇼트, 둘 전체를 보여주는 투 샷까지 같은 연기를 최소 두 번이상은 한 뒤 매끄럽게 바느질 해놓았는데 사실상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장면이다. 또한 지미가 헨리에게 레스토랑에서 마지막 은밀한 제안(실은 그를 궤멸하려는 속내의)을 하는 장면은 줌인 트래킹 아웃 기법을 사용해 긴장감을 자아낸다.(그 좁은 공간에서 말이다)


몇 가지 더 기술적인 측면을 언급해 볼까? 사람은 무엇인 가를 볼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이동시킨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프레임 속 인물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걸어오게 되면 본인도 모르게 가슴 한편 불안감을 느낀다고 한다. <좋은 친구들>에서 최고의 서스펜스가 창발되는 지점은 어디였던가? 필자는 지미가 카렌에게 명품 옷을 가지고 가라며 골목 구석으로 유도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다. 그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갈 뿐이다. 지미도 돋보기안경 속으로 눈을 희번덕하게뜬체 삭 뒤를 돌아보고 그녀에게 손짓을 할 뿐이다. 그녀가 도착한 골목 구석에는 덩치 큰 남자들이 일하는 듯 걸어 다니긴 하지만 전혀 살인을 위한 도구나 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사보타주>에서 느꼈던 편집과 촬영으로 이룩한 살의를 느끼게 된다.


<좋은 친구들>은 어린 시절 범죄를 동경하던 헨리, 청년이 되어 패밀리에 속해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 점점 비극의 말로로 향해가는 그들.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헨리를 중심으로 묘하게 변해가는 인간상이 담겨 있다. 갱들의 삶에 가까운 환경에 살고 있던 헨리가 악인이 되어가는 과정, 수가 틀려지니 바로 주변인을 쳐내기 시작하는 지미가 그러한데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헨리의 부인 카렌이다. 그녀는 원래 지극히 보수적이고 평범하며 심심하기까지 한 집안의 여인이었다. 처음엔 헨리의 직업이 불안하고 그가 외박, 외도를 하는 행위에 치를 떨지만 어느 시점이 오면 목숨을 걸고 마약장사를 하며 가족에게 돈을 퍼나르는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범죄를 두 팔 겉고 돕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감독은 평범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이 폭력성에 결탁할 수 있게 되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그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주차를 할 필요도 없고, 법 따위는 지킬 필요가 없으며 감옥에서도 위스키를 즐길 수 있는 존재이다. 특히 유명한 이 영화의 롱테이크 장면을 떠올려보자. 요리를 하기 위해 각자 분주한 복잡다단한 주방을 완벽히 가로질러가는 그들의 모습. 삶의 역군들과 대조되며 날치기로 통과해대는 그들의 비열한 삶을 보여주기에 완벽했다. '돈' 때문일까? '명예' 때문일까?, '비틀린 권력' 때문일까? 이 모든 것이 가져 다 준 왜곡된 '지위' 때문은 아닐까? '권력의 맛을 본 자는 절대 그 권력을 내려놓지 못한다고 했던가?' 어쩌면 우리는 그 정상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할리우드의 특급 배우들같이 보이는 그들의 삶을 어느 순간 동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점점 말로로 치닫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양가적인 감정의 절차를 이어갈 때쯤, 헨리는 갑자기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우리에게 말을 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갱들의 삶의 말로는 비극일 뿐이다. 그들이 화려해 보이는 것은 이것이 영화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려는 듯.

"지금쯤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당신. 지금까지 그들을 동경하지는 않았습니까?"라고 조롱하려는 듯.


★★★☆ (별 3개 반)

열등감과 우월감에 사로잡힌 우리를 조롱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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