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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May 21. 2017

다시 BORN '녹터널 애니멀스'

착해빠진 사람은 살 수 없는 세상


다양한 측면에서의 계급 논리가 보인다.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전라의 고도비만 여성들의 전위예술은 수잔(에이미 애덤스)의 ‘정크’라는 작품이었다. 바로 뒤에 붙는 쇼트 속 어딘가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수잔은 참 고고하다. 저질스러운 음담패설을 하는 방송을 보면서,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지만 꼭 입 밖으로 ‘싸구려’라는 한마디를 뱉고 만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이 작품 속 그들보다 우아하다고,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차이는 존재한다. 과거 수잔과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의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게 된 이유는 결국엔 그들의 태생적인 ‘수저’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먹이사슬 피라미드는 에드워드의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에서는 좀 더 거칠고 직접적인 관점에서 묘사되는데, 소설 속 토니(제이크 질렌할)가 겪는 비극이 더욱 무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그가 초식동물이고, 레이(애런 존슨) 일당이 육식동물이기 때문이다. 즉, 후천적인 어떤 것이 아닌 남성으로써의 정력적인 혹은 신체적인 차이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계급은 나뉘기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상위 포식자인 줄 알았던 일당들도 결국엔 공권력으로 짓누르는 경찰 바비(마이클 섀넌)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는 점이다. 이러니 필자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의 계급 논리가 보인다고 언급한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점은 이 피라미드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일지라도 영화 속에서 누구 하나 안온함이라는 것은 사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톰 포드 감독이 바라보고 있는 현세는 이토록 디스토피아라는 말인가?


이 영화에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하늘’이 인서트 되어있는데(하늘만 잡혀있기도 하고,로 앵글로 비극과 같이 담기기도 한다.) 간혹 보이는 십자가와 비슷한 의도로 사용되어 감독의 세계관을 좀 더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수잔이 살고 있는 동부 뉴욕, 토니가 지옥도를 겪는 서부 텍사스. 수잔이 부르즈와라면 에드워는 프롤레타리아.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라는 선천적인 차이까지. 그들이 겪는 일련의 사건은 어느 카테고리 안에 소속되든지 모두 같은 하늘 아래 일이고, 하늘과 십자과는 늘 무심함으로 일관한다. 그 무심함을 감독은 처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수잔의 친구가 말했듯이 세상은 부조리하다. 이미 출생의 순간 꽤 많은 것이 차이가 나니 말이다. 권선징악, 평등과 같은 단어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치기 어린 희망사항일 뿐이다.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 2016년 作)’


FRAGILE. 깨지기 쉬운. 수잔은 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톡하고 건드리면 바로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인간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19년 전 헤어진 연인 에드워드로부터 소포가 배달된다. 소포는 그가 쓴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 수잔은 소설을 읽으며 대목 대목마다 자신과 에드워드의 과거를 반추하기 시작한다. 즉 영화는 수잔과 애드워드의 과거, 책 속 토니가 겪는 사건, 뉴욕의 수잔의 삶까지 플래시백과 액자식 구성의 3중창으로 진행된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급작스러운 카체이싱이 등장하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극도의 몰입감에 사로잡힌다. 2차선 도로를 정확히 등속으로 달리는 두 대의 차를 뒤에서 바라본 시점 쇼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서스펜스는 시작된다.


토니와 에드워드를 제이크 질렌할이 1인 2역으로 연기했다는 것은 분명히 둘을 일체화 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토니의 상황을 메타포로 하여 ‘너에게 받은 고통이 이 정도로 끔찍했다.’라고 수잔에게 우회적으로 전달하려 함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녹터널 애니멀스>는 기본적으로 복수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제이크 질렌할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는 점점 대중성과 예술성을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연기자가 되어가고 있다. 칸과 오스카를 넘나든 달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를 연기하기에 다소 피지컬이 콘티뉴이티가 안 맞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의 소심한 움츠림과 어색한 총잡이 그리고 초식동물의 연약한 눈망울은 진심으로 다가온다.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는 굉장히 미니멀하다. 톤을 높이거나, 몸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에서 우리가 감정을 읽을 수 있는데, 자신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아닌 영화를 빛나게 해주는 연기를 하고 있다. 일군의 관객은 두 주연의 연기가 덜해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도 텍사스 레인저 바비 역의 마이클 섀넌과 지리멸렬한 악인 레이 역의 에런 존슨의 압도적이 호연 때문일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그들은 분명히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마이클 섀넌이 <8마일>의 지질한 한량이었다는 사실과 에런 존슨이 <킥 애스>시리즈의 데이브 리쥬스키였다는 사실은 후에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연기 스펙트럼이 꽤나 넓은 배우들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극에 달한 관객의 분노를 통쾌한 궤멸을 통해 씻어주려는 의도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불필요한 노출과 과격한 폭력장면들로 관객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시각적 자극은 최소화하고 정서 혹은 상상력을 자극하여 음울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물론 시체의 뒤태와 섹스 후 나른하게 누워있는 수잔의 딸의 뒤태의 교차편집, FRAGILE, REVENGE라는 상징적인 문구들의 나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기어이 극 중 인물들을 통해 들려주고 마는 감독의 과잉 친절은 한창 뻗어나가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제한 시켜 답을 정해준다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다.


영화가 마지막에 다다를 때쯤 절규하는 토니의 모습과 수잔은 교차편집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토니의 고통을 오롯이 수잔에게로 이관하게 된다.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자신의 초판을 주려는 것은 단죄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소포를 뜯다 베인 손가락처럼 사소하지만 지속적으로 신경을 건들며 원죄의식을 노출시켜 환부를 후펴파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필자의 오해라면 그는 약속 장소에 나타났겠지.


수잔은 낙태를 자행한 살인자였다. 토니도 끝내 살인을 하고 만다. 어둠이 가득 차버린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녹터널 애니멀스(야행성 동물)가 되는 것 밖에는 없다. 정녕 착해빠진 사람은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인가?


★★★☆ (별 3개 반)

착해빠진 사람은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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