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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n 04. 2017

3이 4가 된다면

라쇼몽 [쯔욘의 영화한잔]



만화책 <나루토>. 구미로 변하기 직전의 나루토와 3대 선인 중 한 명인 오로치마루가 일기토를 벌이는 묘사. 괴물이 되기 직전의 나루토는 어마어마한 차크라를 응축한 무엇인가를 던지고 오로치마루는 자신의 양 엄지손가락을 물어뜯어 '혈'을 이용한 소환술을 시전한다. 이 방어기제의 이름은 '삼중 나생문'이었다. 이것이 필자가 '나생문'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경험이다. 다음은 뜻풀이를 보자. 그물 라(羅), 날 생(生), 문 문(門). 살아있는 것들을 그물로 잡아주는 문이라는 뜻일 텐데 말하자면 현세와 사후세계, 산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요단강의 의미 일 것이다. 이 단어를 일어로 읽으면 라쇼몽이 된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 라쇼몽 아래라는 설정은 이제 인간의 에고이즘이 넘지 말아야 할 경계의 어느 지점에 와있다는 듯 의미심장하다. 필자의 이 생각은 영화 속 가장 뇌리에 박히는 다음 한 대사에 의해 확신으로 변하게 되는데, "라쇼몽 아래 살던 도깨비들이 사라진 이유는 인간들이 무서워 서래" 기근, 전쟁, 약탈, 자연재해 등 수많은 재앙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 중 꽤 많은 부분은 지리멸렬한 인간들에 의해 기인한 것이고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세기 전의 일본 헤이안 시대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나 보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반파된 라쇼몽 아래 3명의 사람이 모인다. 스님, 나무꾼(시무라 타카시), 떠도는 낭인(치아키 미노루). 낭인은 스님과 나무꾼이 얼마 전 겪은 미스터리 한 살인사건에 대해 듣게 되고 그와 함께 관객은 이 이야기 속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그런데 필자는 '3'명이라는 숫자가 참 의뭉스럽다. 3은 왠지 불안하다. 짝을 짓는다면 한 명은 혼자 남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으로 외로움을 내포하고 있는 '홀수'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도 아담과 이브 2명이었고, 성별, 음양의 조화는 '2'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영화 <넘버 3>의 태주(한석규)가 처절하게 고군분투를 하게 되는 것도 3이라는 숫자에 기인한 것이었다. 인간은 2명에서 3명이 되는 순간부터 비밀유지가 불가하고 파벌을 조성하여 박해를 시작하게 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주 거칠게 표현한다면 말이다. 이토록 3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라쇼몽>은 3명의 사람이 모여 다른 3명 사이에 벌어진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즉,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세계는(일단은 <라쇼몽>으로 범위를 국한 짓는다) 기본적으로 불완전성을 전제로 한다. 생각해보니 그의 다른 작품 <7인의 사무라이>의 멤버도 홀 수였다.


'라쇼몽(In The Woods, 1950년 作)' 



나무꾼이 말하는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산길을 지나고 있던 부부에게 악명 높은 도적 다조마루(미후네 도시로)가 접근하고, 부인에게 나쁜 마음을 품은 그는 남편을 결박하고 여인을 겁탈한다. 그리고 얼마 후 나무꾼에 의해 남편의 시체가 발견된다. 영화는 판사 앞에 서게 된 용의자들과 목격자들의 진술을 들으며 그들의 왜곡된 기억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사건의 퍼즐이 맞춰지기는커녕 미묘한 균열은 점점 벌어지기만 한다. 필자는 이 곡해의 이유를 찾기 위해 인물들 한 명 한 명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싶어졌다. 우선 공통적으로 그들 모두가 지키려 한 것은 자신의 안위와 자존감이었다.

첫 진술을 시작하는 다조마루가 끝까지 지켜내고 싶어 했던 것은 결국엔 자신의 남성성이었는데,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는 기괴할 정도로 악명 높은 웃음을 지으며 부부를 조롱했고, 끝까지 마초적이라는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부인이 자신의 입맞춤에 마음을 여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인간상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설마 자신이 말에서 떨어졌겠냐며 역정을 내는 그의 모습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이 꼭 들어맞는 경우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트라우마,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면을 오히려 과시적으로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는데 다조마루의 행실이 바로 그렇다. 마음속 깊은 곳에 약함과 소심함이 있으니까 오히려 외적인 면이 비뚤어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은 남편. 다조마루에게 목숨을 잃은 그는 급기야 다른 사람에게 빙의되어 재판장에 나타나고,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부인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에 걸맞은 책임은 지었다는 논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의 논조를 따라가보면 결론적으로 모든 탓을 상황과 나머지 두 명에게 돌리고 있다. 자신의 부인을 음해하면서까지 말이다. 죽어서까지도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얼마나 중요했으면 귀신이 되어 나타나 사건을 조작하려 하는 것인가? 그런데 알고 보니 사건을 재배치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히 목격자인 줄만 알았던 나무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도둑질이 발각되는 것이 두려워 거짓 증언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부인(쿄 마치코). 그녀의 거짓은 본인은 정조 짙은 여인임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욕을 당했을지 언정 사회적 맥락에 부합하는 인물임을 표출하기 위한 것인데, 타인의 시선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행위도 남편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은 한 여자의 아내로써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문제는 상황과 타인들이라는 결론 말이다. 그녀는 어떻게 보면 이들 중 가장 엄청난 비수를 감추고 있는 무시무시한 인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다조마루를 남편과의 지긋지긋 한 결혼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해방구로써 생각했다는 대사),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새장에 갇혀버린 비련의 여주인공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녀 또한 자기 자신의 안위를 기본적인 도덕적 가치보다 중요시하는 인물임은 맞지만 지리멸렬한 세상에서 차별까지 받는 존재이니 다른 3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가련해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이들 모두의 행동의 본질은 이기주의라는 것은 불변이다.


그러면 <라쇼몽>은 인간의 이기주의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그들의 자기변호는 영화의 맥락상 판사를 향한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관객을 향한 것으로 보인다. 판사의 역 쇼트가 단 한 쇼트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의견의 방증일 텐데, 그들이 과거를 반추하는 것을 좇다 보면 단지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얼룩덜룩 가려진 꺼풀을 하나씩 벗겨낸 사건의 실체가 아니다. 더욱 크게 목도하게 되는 것은 바로 사건 속에 놓여있는 인간들의 이기심이다. 특히나 한 명 한 명의 증언은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관점으로 카메라에 담기는데, 예를 들어 다조마루가 기억하는 남편과의 결투 장면과 나무꾼이 보았던 그들의 결투 장면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전자는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방식의 칼부림이었다면, 후자는 검술이라고 할 것도 없는 애들 싸움에 가까운 것이었다. 각자의 주체적인 입장과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그들의 이기심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는 서두에 '3'이라는 숫자에 꽤나 질척거렸다. 다수결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 최소 단위인 3명. '갈등'이라는 것의 불씨가 되는 3이라는 숫자. 언급했듯 3으로 표상되는 이 세상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인간은 이토록 이기적이다. 불완전한 세상과 인간의 이기심이 만나니 발생하면 안 되는 시너지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3이 불안하다면 짝수인 4가 되어 다소 안정감이 든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이 세상이 조금 평온해진다면 말이다. 답이 보이지 않던 3명의 증언이(다조마루, 부부) 해결되는 것은 나무꾼의 개입으로 '4'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나약함에 비감과 침통함에 젖고 실소마저 짓던 라쇼몽 아래 3명(스님, 나무꾼, 낭인)이 다시 한번 희망을 품게 되는 것 또한 버려진 아이 한 명이 발견되어 '4'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완벽하게 만들어 그래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헌데 필자는 이것이 미봉책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필자의 견해가 맞다면 <라쇼몽>이 해결해준 것은 세상의 불완전함이지 인간의 이기심은 아니지 않은가?


★★★★(별 4개)

불완전한 세상과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시너지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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