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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May 27. 2017

인생은 가면극

세일즈맨 [쯔욘의 영화한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인간의 인생은 기본적으로 가면극이라는 것. 우리는 부모님, 친구, 상사 혹은 선배, 연인, 처음 만나는 사람 등 상황, 소속, 마주하는 대상에 따라 모습을 조금씩 달리한다. 다중인격과는 다르다. 가시적이라는 표현은 지나치다. 이 모습, 저 모습, 그 모습이 모두 합쳐진 것이 하나의 '나'이다. 따라서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혹은 안다라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당신은 상대의 가면 중 하나를 보고 있을 뿐이다. 좀 더 가깝고 오래된 관계라면 수많은 가면 중 몇 가지를 더 봤을 뿐, 절대 그의 전체를 알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쉽게 예단하고 선입견을 갖는다. 이 지점이 필자가 전제하려는 두 번째 속성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의 대상을 넘어 하나의 사건을 파악하는 데에도 꽤 쉽게 결론을 내린다. 피상적인 단면들 혹은 몇 가지 추론을 통해서 답을 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와 택시 합석을 하는 옆자리의 노인에게는 그는 단지 배려 없는 쩍벌남일 뿐이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은 그를 더욱 불량하게 보이게 했을지도 모른다.(노인은 결국 앞 좌석 학생과 자리를 바꾼다). 그녀가(노인이) 택시 장면이 나오기 전의 시퀀스를 보았다면(제자들에게 인기 있는 선생님) 이렇게까지 행동했을까? 그녀가 본 것은 에마드라는 인간의 찰나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직시한 바로 그 모습으로 그는 그녀에게 평가된다. 정작 에마드 본인도 비슷한 맥락의 행위를 하게 되는데 자신의 자는 모습을 찍은 핸드폰 사진을 지우라고 제자에게 호통을 치다가 결국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한다. 소년은 아버지를 여의었었고, 소년의 말대로 사진은 삭제되어있었다. 모든 면을 알지 못하니까 행하게 되는 과오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세일즈맨>이다. 물론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소설에서(영화 속에서도 언급된) 가져온 제목이지만 필자는 아서 밀러의 명작 소설의 레퍼런스는 접어두고 영화의 제목 자체만을 읽고 싶다. 무수히 많은 직업군 중에서 대놓고 가면을 써야 되는 직업이 있다면 아마도 영업직일 것이다. 항상 웃어야 한다. 그래야 돈이 나온다. 그래야 생활이 된다. 영화의 내용과는 무관해 보일지는 모르나, 인간의 어떤 속성에 대한 고찰을 영화가 제시한다는 점에서 꽤나 적합한 제목이라고 느껴진다.


'세일즈맨(The Salesman, 2016년 作)'


에마드라는 캐릭터 자체가 필자가 전제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메타포이다. 그는 낮에는 선생님이고, 밤에는 연극배우이며 때론 자동차를 파는 세일즈맨이기도 하고, 아내에게 비극을 안겨준 범죄자를 좇는 형사이기도 하다.(세일즈맨과 형사는 직업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전혀 이물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의 모습이 우리의 삶 속에서 보이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캐릭터만으로도 필자의 첫 번째 전제에 대한 방증은 충분할 것이다.


부족한 정보로 판단한다.라는 필자의 두 번째 전제 또한 영화의 전반에 철저하게 걸쳐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관객으로 하여금 부족한 정보로 판단하게 만든다. 에마드와 그의 부인 라나(타라네 앨리두스티)가 살고 있는 거주지가 무너지는데 이것의 명확한 이유는 영화가 종료될 때까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슬쩍 부감으로 포클레인을 비출 뿐이다. 그들이 공연하는 무대 위 연극도 마찬가지. 우리는 퍼즐의 어느 조각조각만 보게 될 뿐 연극의 전체 내용은 추론에 의존해야 한다(물론 <세일즈맨의 죽음>을 공연 한 것이지만 정보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무엇보다 라나가 겪는 사건을 좇아가는 과정은 지속적으로 관객이 시험에 빠지게 축조되어있다. '과연 그녀는 무슨 일을 당한 것인가?' 조금 더 은밀한 내면을 끄집어 낸다면 '그녀는 성적인 고통을 당한 것인가 아닌 것인가?' 관객과 에마드는 묻고 또 묻는다. 에마드는 전에 이 집에서 살고 있던 여인의 음성메시지를 듣는데 그 메시지에는 동료이자 건물주인 바바크(바바크 카리미)의 목소리가 녹음되어있었다. 우리는 이전에 살던 여인의 문란한 행실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에 왠지 그가 추파를 던진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비약이고 주관이지만 무엇인가 이 사건과 연관이 되었나?라는 착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의 괄호가 채워지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시험에 빠진다. 거의 확실한 용의자로 설정된 사위의 첫 모습은 왠지 서늘해 보였다. 하지만 선량한 그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순간에 우리도 그를 재평가하게 된다. 이렇게 쌓여가는 파편들로 추측하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은 결국 필자가 서두에 언급한 인간의 두 번째 속성에 대한 자가 증명이 된다.


그러니까 <세일즈맨>은 보고 판단하는 인간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다는 말인데, 연극 무대에서 하는 그들의 공연에는 연극 자체를 비추는 카메라는 당연히 존재하지만 그 쇼트들 만큼 무대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카메라도 보인다. 공연 자체가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면 다미엔 차젤레 감독의 <위플래쉬>의 마지막 시퀀스처럼 관객들의 리액션 쇼트를 빼어버렸을 것이다. 이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이 받은 감흥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에서처럼 관객들의 감동 젖은 리액션을 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관객을 담는 카메라는 그들이 '본다'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유리창 너머로 공연을 보고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교묘히 오버랩 되어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보인다. 왜 그랬을까? 필자의 전제로 풀어본다면 답은 이렇다. 연극을 하는 '배우'라는 직업은 서두에 언급한 영업직만큼 가면을 대놓고 써야 되는 일 일 것이다. 과격하게 말하면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인생사의 압축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고, 관객들의 시점은 이 가면극을 보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시점을 비유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생은 가면극이고, 모든 인간관계와 상황 판단의 대상은 완벽한 진실이 아닌 가려진 진실이라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몽타주로 연극 무대의 쇼트들을 보여주는 것도 '인생은 한편의 연극이다'라고 말하려는 맥락으로 보인다. 사소하게 흘러갈 수 있는 사건들 하나하나까지도 결국 영화의 메시지와 모두 연결되니, <세일즈맨>의 칸 각본상의 이유는 이 틈새 거의 없는 스토리 축조술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렇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채근하고 자학해야 할까?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인간을 한없이 비판하기는 힘들다. 인간은 원래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 컨트롤하는 것도 힘든 우리인데, 어떻게 타인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알면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세일즈맨>은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 없는 인간의 깊은 속성 하나를 수면 위로 견인하는 역할까지만 한다. 본인도 자신의 영화에 답은 모르겠다는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어느 인터뷰처럼.


범인으로 밝혀지는 노인의 힘없는 숨소리에 혹시 잠시 동정을 하게 되는 관객들은 없었는가? 내 아내를 탐한 자의 또 다른 가면에 결정이 바뀌는 아이러니. <세일즈맨>의 일격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 (별 4개)

인생은 가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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