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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n 05. 2017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까?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쯔욘의 영화한잔]


짐 자무쉬 답다. 이 영화는 수많은 문화예술적, 과학기술적 레퍼런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역사의 흐름과 결부시켜서 이 측면들을 읽어 낼 수 있는 소양이 함양되어 있다면 영화는 더욱 깊고 넓게 보일 것이다. 하나하나의 상징과 기호를 매칭 시켜나간다면 분명 더욱 풍성한 영화적 체험이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만큼의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에 꽤나 피상적으로 이 영화에 대해 논하게 될까 우려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자 읍 조리려는 이유는 짐 자무쉬의 또 다른 영화 <천국보다 낯선> GV 행사장에서의 정성일 평론가의 조언이 뇌리에 스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쓰십시오".


세상에는 어느덧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정보화 시대의 속도를 다 따라가지도 못한 체 현상 유지 중인데 A.I 의 시대의 도래에 대한 경고라니. 속도는 점점 빨라져만 간다. 그런데 무엇인가 발전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들은 소멸해 간다는 이야기이고 발전해 나가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놓치고 가는 것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특히 과학기술, 예술이라는 분야에서는 더욱 와 닿는 이야기 일 텐데, 인간의 편의성, 기호(嗜好)와 밀접하게 결부되어있는 카테고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들이 갖는 상업적 측면(그러니까 경제논리)의 고려라는 본질성 때문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대중들이 더 좋아하는 방향으로 빨리 발전해야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론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의 경각심 부족에 있다. 새로운 것이 빠르게 많이 쏟아지게 되니 당연히 소비자들은 쉽게 접할 수 있고, 창출물의 가치에 비해 금방 피로도를 느끼게 된다. 즉, 인스턴트 화가 불가피하다는 뜻인데, 창작자의 고된 시련과 작고의 시간에 비해 소비자는 쉽게 소화하고(아니 소화도 제대로 시키지 않은 체) 배설하고 있는 실상이다. 이것은 예술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창조자에게 악영향을 주는 결과를 도출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어떤 창조자들은 좌절하다 못해 타협하고 어느 순간 고객의 입맛에 딱 맞는 저품질 생산품을 양산해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 비극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예술은 사멸한다. 이 영화에는 사라져 가는 것들 중 사라지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많은 카테고리 중에서도 예술 그중에서도 음악을 필두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 2014년 作)'


하이 앵글에 잡힌 밤하늘의 별들(우주)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회전의 이미지는 전축에 올려진 LP의 회전으로 조응되고, 다시 한번 이 회전은 로 앵글에 잡혀 나른하게 누워 있는 이브(틸다 스윈튼), 아담(톰 히들스턴)의 회전으로 이전된다. 정성일 평론가는 진중권의 <문화다방>에 출연해 모든 예술 중에서 우주의 원리가 담겨 있는 음악이 가장 경이롭다고 말한 바 있다. 비슷한 논조로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사랑하지 말라>에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프리재즈 음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여 <주역>의 64괘로 끝맺음 하는 구절이 있다. 말인즉슨 꽤 많은 지식인들은 음악에서 우주의 원리를 찾는다는 말이다. 분명 7개의 음계로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는 것은 초자연적이긴 한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오프닝은 우주는 음악이고 음악은 이 두 남녀라는 비유의 몽타주라는 말이 된다. 즉, '음악'을 유형화, 실체화해놓은 것이 이브와 아담이다. 인간의 순혈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흡혈귀라는 설정이 기묘한 듯 보이지만 그들이 음악이라는 필자의 전제에 동의만 한다면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쉽게 설명이 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브와 아담은 '인간좀비'라는 표현을 하며 인간들을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 음악의 가치를 모르는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에 혐오를 느끼는 듯한 어구는 묘하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의 한 대목('도깨비가 라쇼몽에서 사라진 이유는 인간이 무서워서이다')과 통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들에 대한 지리멸렬함의 감정만큼은 분명히 <라쇼몽>과 통한다. 이 의견이 무리하다고 생각한다면 필자는 짐 자무쉬가 뽑은 BEST 10개의 영화 중 2편을 언급하겠다. 오스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구로사와 아키라 <7인의 사무라이>.


남녀 주인공의 이름이 아담과 이브라는 설정부터 곱게 넘어가기는 힘들다. 당연히 우리는 성경의 창세기 레퍼런스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진실로 가치 있는 것들의 가치 입증 문제는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시작된 것들이 아니고 이미 기원전부터의 문제라는 뜻인데, 피타고라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갈릴레오는 감옥에 들어갔고, 코페르니쿠스는 조롱당했으며 뉴턴은 늙어 죽을 때까지 연금술만 해야 했다. 그리고 테슬라의 X선 연구는 짓밟힘을 당했고 다윈은 아직까지 누군가에게는 욕먹는 대상이다. 이것들은 아담이 역사를 관통하며 바라본 참담함이다. 가치 있는 창출물들의 비극적 말로.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을 끝으로 내몰고 있는 인간 좀비들로부터 기인되었다. 물론 영화는 사태를 오롯이 향유하는 자들의 탓으로만 몰고 가지 않는다. 이브의 여동생 애바(미아 와시코브스카)가 등장하는 순간부터는 생산자에게도 문제의 원인에 대한 총구를 향한다. 1975년 프랑스 쇼를 보며 킬킬대는 애바의 모습. 음악을 시각적 자극에 사용하는 이 쇼는 아담의 집 분위기와는 너무도 이질적이다. 몇 안되게 아담이 소통하는 인간 이안(안톤 옐친)이 끝내 애바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 사건도 마찬가지. 아담이 그를 택한 이유는 그의 순수한 음악에 대한 열정, 가치 있는 음악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애바는 음악의 생산자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그녀도 흡혈귀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파괴하는 존재이다. 결국 그녀는 아담에 의해 다시 쫓겨난다.


비틀스의 멤버 폴 메카트니는 '음악에 대해 편견을 갖는 것은 인종차별 보다 무서운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 상황인가? 자신이 음악에 대해 조금 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은 대중음악을 저평가하고 인디음악만을 신봉한다. 반대로 아이돌 음악에만 매달리는 광신도들에게 조금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음악을 소개하면 올드하다는 평으로 돌아온다. 이문세의 <휘파람>을 이야기할 때는 듣는 둥 마는 둥이지만 로이킴이 리메이크한 <휘파람>이 브라운관을 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문세 노래를 찾기 시작한다. 물론 현재 K-POP의 중심이 되는 가수들이 기성 가수들의 명곡을 다시금 수면 위로 견인해 주는 일이야 감사한 일이지만은,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불만에 이 영화는 동조를 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음악에 대해 예의 없는 것들에 대한 짐 자무쉬의 일갈이라고 할까?


필자는 아담과 이브가 음악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에 대한 메타포라고 했다.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혈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 순혈을 갖게 되는 순간은 바로 열정과 순수가 뒤섞인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이 만발하는 그 순간의 순혈. 음악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오직 사랑하는 이들에게서만 나오는 그것이지 않을까? 서두에 언급했듯 이 영화는 음악을 필두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미시건 극장, 결국 순혈을 구하지 못해 유명을 달리하는 또 다른 흡혈귀이자 소설가 말로(존 허트)의 죽음을 보건대 소멸되는 많은 것들에 대한 처연함이 묻어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문장은 틀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별 3개 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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