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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n 06. 2017

메시지도 클리셰도 없었다

겟 아웃 [쯔욘의 영화한잔]

크리스(다니엘 칼루야)가 아미티지(앨리슨 윌리암스)의 공간으로 들어온 순간 정원사 윌터(마르쿠스 헨더슨)와 가사도우미 조지나(베티 가브리엘)가 그를 바라보던 그 불편한 눈빛은 낯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분노의 추적자>에서도 본 적이 있었던 안온하지 않던 그 눈빛. 킹 슐츠 박사(크리스토퍼 왈츠)는 자유인 장고(제이미 폭스)의 부인 브룸힐다(케리 워싱턴)에 대한 정보를 찾고 브리틀 형제를 잡기 위해 백인 거부 베넷의 사유지를 방문한다. 그때 목화밭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이 말을 탄 장고를 바라보던 그 눈빛 말이다. 그러니까 윌터와 조지나의 눈은 손님을 맞이하는 그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과 같은 계급 피라미드에 위치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닌 자에 대한 이질감 혹은 곧 끔찍한 일을 겪게 될 자에 대한 우려스러움 같은 것이었다.


이 영화가 <장고-분노의 추적자>와 유사한 점은 한 가지가 더 있는데, 그전에 우선 <겟 아웃>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하여 언급해야겠다. 영화 속 백인들이 크리스를 대하는 친절에는 왜인지 모르게 이물감 같은 것이 스며들어있다. '오바마가 또 대선에 출마하면 대통령으로 뽑았을 것이다'라는 정도의 딘 아미티지(브래드리 휘트포드)의 이야기는 '나는 인종차별하는 백인이 아니다' 정도의 언질을 주기 위한 센스 있는 멘트였다고 넘어가 줄 수는 있으나,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땠었냐?' 등의 질문이 오간 그 파티에서부터는 분명히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우리는 동정심에 혹은 순수하고 맑은 마음이라고 여기면서 던지는 질문이 어쩌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소수자이고 아랫사람일수록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에는 이미 '나는 너를 동정하고 있다', '너는 동정받아야 되는 사람이다'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겟 아웃>은 오래된 흑인 인종차별 문제와 서슬 퍼런 과거의 흑인 노예 문제를 레퍼런스로 차용하면서 영화의 근간을 다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장고-분노의 추적자>와의 유사성을 말하려는 것인데, 이런 레퍼런스들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장르 영화의 외피를 입히는 데에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고-분노의 추적자>가 흑인 노예제도에 대한 일갈을 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잘빠진 웨스턴 장르 영화로 보는 것이 그럴듯한 것처럼, <겟 아웃> 또한 여러 가지 불편한 진실을 시사하기보다는 뻔하지 않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쾌감을 선사하는 영화로 완성되었다는데에 한 표를 던진다는 뜻이다. 즉 트럼프 시대와 결부 지으며 시대의 맥락에서 영화를 읽기보다는 클리셰 거의 없이 잘 축조된 신선한 장르 영화로써 <겟 아웃>을 본다는 것이다.


'겟 아웃(Get Out, 2017년 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언제부터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자신이 흑인인 것을 부모님이 아시냐고 걱정하던 크리스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아미티지는 평안하고 평등했다. 이것이 처음 깨지는 순간은 아미티지의 고향으로 내려가던 기다란 숲 속의 차도에서부터 였는데, 고라니 한 마리가 차에 뛰어들었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 자동차는 정면에서 봤을 때 거의 완벽히 대칭을 이루고 있다. 고라니가 달려들어 망가뜨린 것은 좌측(크리스가 타고 있던 조수석) 백미러였고, 이로써 자동차의 대칭은 깨지게 된다. 공간을 바꾼 다음 쇼트들에서도 대칭 파괴는 이어진다. 아미티지의 고향 저택의 외관은 거의 완전한 데칼코마니를 이룰 정도로 대칭이다. 창문의 위치, 문 앞 장신구들의 위치까지. 정면에서 바라보던 그 대칭의 미디엄 쇼트 안으로 우측에서 자동차 한 대가 들어오면서 대칭은 깨진다. 다음 쇼트들은 딘 아마티지가 응접실로 크리스를 이동시키는 장면인데, 이때 카메라는 이 공간이 세트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아니 눈치채라고) 동선으로 이동한다. 영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영화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관객을 눈속임하는 것이 숙명인 예술인데 왜 실재적이지 않음을 대놓고 보여 주려는 것인가? 그 답은 생각보다 간단한다. '가짜'니까. 아미티지 가족의 친절과 인종평등주의는 전부 거짓이니까.


정리해보면 <겟 아웃>의 초반부는 아미티지 저택을 방문하는 순간까지 '평등'으로 보이는 것들에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하고, 그 집에 들어간 순간 이제 벌어질 일은 '가짜'임을 예견할 수 있게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즉, 형식(미장센, 구도, 카메라 동선 등)에서부터 영화의 스토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인데, 이런 형식과 주제(혹은 스토리)를 일치시키는 방법론의 기원을 좇으면 앨프리드 히치콕의 <사이코>에 도달하게 된다. <사이코>는 인간의 두 가지 내면에 대한 이야기인데, 히치콕은 그 주제를 형식과 일치시키기 위해 여주인공 마리온(자넷 리)이 영화의 정중앙부에 사망하고 그의 언니로 등장하는 릴라(베라 마일즈)를 새로운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관객을 당혹감에 젖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즉, 두 가지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위해 전체 영화의 구조를 반으로 나눠질 수 있도록 해놓았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본인의 세계관을 전달하려 하기보다는 영화의 모든 면을 하나의 주제를 위해 구동 될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사이코>가 훌륭한 스릴러 '장르'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살인자가 나오고 혈이 낭자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만들어진 장르 영화인가?'라는 점 때문일 것이고, <겟 아웃>이 선택한 방법론도 바로 영화의 형식과 방향을 일치시킨 히치콕의 그것에 젖줄을 대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 영화를 호감 가는 장르 영화로 평하게 된다.


<겟 아웃>이 장르 영화로써 눈에 띄는 이유는 이런 축조술뿐만이 아니다. '클리셰'가 거의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는데 공포, 스릴러 장르는 심장 쫄깃함이 주요한 장치이고 이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많은 경우 중심인물들이 비이상적인 행동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누가 봐도 하면 안 되는 짓을 벌인다든지, 갑작스레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엉뚱함을 보인다든지 등의 억지스러움을 이용하여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기 일쑤인데 크리스는 충분히 상식적이고 적절한 의심의 잣대를 들이밀며 한발 늦지 않은 사고 판단을 한다. '상황이 문제인 것이지 사람은 문제가 없는 서스펜스' 말이다. 그가 탈출하는 시퀀스의 면면들을 보면 관객들이 체하기 직전, 지치기 직전까지만 하는 놀라운 편집의 저글링을 보인다. 조던 필레 감독은 불필요한 곁가지들을 모두 처네 담백하지만 그래서 맛은 썩 괜찮은 요리를 만들어낸다.


필자는 이 영화의 장르'만'이 호의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장르적인 측면을 상대적으로 더 집중해서 관람하게 되었다는 뜻인데, 시대에 근간을 둔 메시지는 없지만 분명 생각해볼 거리는 존재한다. '세뇌'라는 것이 가능할까? 방법이 최면이든 폭력이든 과연 누군가의 뇌를 조종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 것일까? 그 옛날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오랜 시간 백인들에게 길들여졌던 것은 그들이 태생적으로 저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음에서 비롯된 무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코 그들의 깊은 마음과 머릿속까지 빼앗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크리스, 윌터, 조지나, 앤드류의 '심연의 방' 안에 자신들의 아이덴티티가 존재했던 것처럼.


★★★☆ (별 3개 반)

메시지도 클리셰도 없는 잘 빠진 장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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