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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l 02. 2017

너의 이름은.

네루다 [쯔욘의 영화한잔]


타고난 우월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경, 시기라는 이름의 추종이 존재한다. 추종을 하는 자와 추종을 당하는 자. 이 관계는 기본적으로 일방적인 방향(하는 자에서 받는 자로)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나 생각보다 양방향적인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밀러스 포먼의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는 일평생 모차르트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득 찬 삶을 살더니 급기야 황혼의 길목에서도 정신병원에 입원한 체로 그를 시기하고 동경했다. 둘의 관계의 방향은 재능이 있는 자로부터 더 재능 있는 자로 향하고 있고, 그 이유는 동시대에 태어나 자신에게 비극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일반론이다. 즉,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된 절망 정도로 보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라는 뜻인데, 필자는 조금 다른 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결국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이 정도의 유명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게 병적으로 매달린 것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함 아니었을까?


이러한 관계의 아이러니는 꼭 우월한 자와 상대적으로 열등한 자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칭적인 관계에서도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말콤 X. 둘은 흑인의 평등권 확립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가진 자들이었는데, 태세는 조금 달랐다. 루터는 비폭력 평화시위를 주장했고, 말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은 허용한다는 입장이었다. 어쩌면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두 명의 인물은 서로가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관계는 현대에 넘어와 삼성과 애플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몇 년 전 그들의 특허권 전쟁이 삼성에게 법정 다툼에 의한 경제적 손실을 주었을지 언정 이 세상의 스마트폰은 삼성과 애플 단 두 가지뿐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변질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계속해서 K-POP까지 넘어와 비슷한 맥락의 예를 찾아 보겠다. 소위 인디음악이라는 소수 취향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중적인 음악을 무시하는 작태를 보이는 데에 임진모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조용필이 있었기에 김현식도 있는 것이고, 빅뱅이 있었기에 지금의 오혁도 있다'라고.


이렇게 수평적 관계이든 수직적 관계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생각지 못한 보완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꽤나 허다하고 이 영화 <네루다>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스카 형사(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아이덴티티를 완성해준 것은 네루다(루이스 그네코)였다. 오스카가 네루다의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든, 실존 인물이든,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든 간에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를 의미 있는 사람으로 격상시켜준 사람이 바로 네루다라는 것이다.


'네루다(Neruda, 2016년 作)' 



칠레의 대표적 시인이자 공산주의자인 파블로 네루다는 대통령의 파시즘에 공식적으로 반박을 하고 국회의원 직을 박탈당하면서 지명수배자가 되기에 이른다. 영화 <네루다>는 그의 도피생활과 그 생활의 직전, 직후를 보여주는 전기영화의 측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장영엽 평론가의 말(시적인 추격전)처럼 그의 시처럼 우아한 한편의 추격 스릴러의 장르적 특성을 두르고 있기도 하다. 단순한 역사 고증이나, 경의 표명의 전기 영화가 아니라는 확신이 드는 이유는 네루다를 영웅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은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인물 설정 때문이다(예를 들어 네루다가 유흥과 쾌락을 탐닉하는 장면이 노골적으로 그려지는 등). 심지어 필자는 이 영화가 과연 제목처럼 '네루다에 관한, 네루다를 위한 영화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네루다가 아닌 오스카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의 포스터에 그 누구보다 오스카의 모습이 큼직하게 박혀 있지 아니한가?


즉, 필자는 이 영화가 파블로 네루다보다는 그를 추적하는 오스카의 행보와 내면이 더 중요한 것처럼 축조된 영화로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면 오스카를 조명해보자. 그는 처음에는 네루다를 부정하고 폄하한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네루다에게 읊조린다. 심히 김춘수 시인의 <꽃>스러운 상황이다. <꽃>에 의거한다면 오스카의 죽기 전 명명(命名) 요청은 자신의 삶에도 의미를 붙여 달라는 이야기가 된다. 파시즘의 정권의 개로 살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달려오기만 한 자신도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그럴듯한 삶의 이유를 얻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네루다>는 한쪽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영화가 아니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한다'라는 말은 오스카 입장에서 어떤 선택이든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네루다 추적의 중간중간 그의 글을 읽고 서서히 감화가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정권에 알게 모르게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네루다의 어떤 탁월한 '속성'에 동화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해본다.





그것은 네루다의 어떤 면이었을까? 우선 그가 '민중시인이니까, 무조건 적으로 옳은 사람이니까'라는 논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리가 어떤 한 인물을 분석하는 데에는 다양한 관점에서 엄격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속성들이 그 인물에게 잘 어울린다고 해서 확실한 근거 없이 한 인물에게 여러 가지 호의적인 속성을 채워 넣으면 안 된다는 뜻인데, 예를 들면 네루다가 민중의 시인이고 민중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는 도덕적인 면에서도 당연히 올바르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위험한 일반화라는 뜻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자신의 부인이 있음에도 사창가에 들락거리며 그곳에서 안락을 찾는 사람이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 보면 그런 쪽의 도덕은 오스카가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필자는 오스카의 감화의 이유를 어떤 도덕적인 혹은 교과서적인 맥락이 아닌 서두에 언급한 '관계의 아이러니'에서 찾는다. 네루다는 상대의 신분에 관계없이 '너의 이름을' 불러 '의미'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간 유흥업소의 성 정체성이 불분명한 남자에게도 ;자네의 이름은 무엇이냐?'라고 물어보기도 했듯이 말이다.


그것이 진심이든 가식이든 그 중간 어디에 있든 영화 <네루다> 속의 네루다는 불특정 다수의 존재의 의미를 찾아주는데 꽤나 탁월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면모가 민중의 마음을 '동(動)'하게 했을 것이고, 결국 자신을 적대하는 자에게까지도 감흥을 일으킨 것이리라. 특히나 오스카와 같이 출생부터 정체성이 모호하고(그는 사창가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정치적 입장까지 정리가 안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감화는 더욱 배가 될 것이다. 의미를 조금 더 확장 시켜서 만약 이 영화 전체를 오스카를 주인공으로 하는 네루다의 한편의 시 혹은 소설이라고 여긴다면, 정체성을 잃어버린 남자가 자신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이 이야기 속 오스카는 결국 압도적인 권위에 존재를 부정당하고 정치적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들을 메타포 한 인물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이 영화를 네루다의 시 혹은 소설로 보았을 때) 이 문학의 주제를 도식적으로 굳이 찾는다면 '모든 이들의 삶은 유의미하다'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오스카가 필사적으로 좇은 것은 네루다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이유 아니었을까?


★★★☆ (별 3개 반)

그가 좇은 것은 네루다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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