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란잔 Aug 02. 2017

무력감을 깨달았을 때 오는 평안

그 후 [쯔욘의 영화한잔]



권해효의 극 중 이름이 '봉완'이었다는 사실은 영화를 다 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영화 속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누구도 될 수 있다. 필자는 감독의 직전 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에 대한 글을 작성했던 것처럼 현실 속 홍상수의 삶의 어떤 면들을 텍스트로 끌고 와서 이 영화와 짜 맞춰볼 수도 있겠지만 <그 후>에서는 영화 속 인물들의 레퍼런스를 다수로 확장하여 불특정한 우리들의 이야기로 사유해보고 싶어졌다.


봉완은 자신의 감정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우유부단하며 결정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비겁한 인간이다. 반면에 왠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아 순수한 그래서 참 딱한 인간이기도 하다. 그는 '실체'라는 것은 존재는 하지만 느낄 수만 있는 어떤 것이고, 글로 쓰기 시작하면 조악 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아마도 그의 삶에 실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리라. 실체라는 것은 아마 이런 것 같다. 공허하고 맹탕 같고 밋밋하고 뭐가 없는 것 같은 삶을 채워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노스텔지아랄까? 그래서 그는 휑하게 비어 있는 자신의 내면의 독을 채우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실체라는 것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사랑'인 것 같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가 원하는 바를 향해 좇으면 좇을수록 삶은 밑 빠진 독에 물 붙는 것 마냥 채워지지 않고 갈증은 더욱 심해져만 간다.


사실 어느 누구의 탓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모든 원인은 본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가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하는 행위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외도라면, 그의 행동에 반사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현재의 아내와 딸아이에 대한 무책임함이라는 멍에일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자신의 삶 속의 책임이라는 것은 실체를 향해 달려가기에는 자신의 발목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너무 무거운 삶의 무게이다. 결론적으로 봉완을 이렇게 옥죄는 이유는 본인이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사랑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니, 이 비극은 본인이 직접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전까지는 우로보로스처럼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이 무게의 압력을 못 견디겠으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답지 않게 음악이 나오면서 바로 영화가 시작되어 버린다. 그동안은 단색 화면이 채워진 프레임에 음악이 어느 정도 흘러나온 후에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조급해 보일 정도로 일찍 영화를 시작한다. 제목이 화면에 새겨질 때쯤 부엌의 벽들 사이에서 봉완은 무척이나 외롭게 고립되어 있다. 고립의 직후에 따라오는 쇼트는 아내(조윤희)의 의심에 겸연쩍게 음식만 쩝쩝대는 그의 모습. 비슷한 구조는 중후반부에도 한번 더 나오는데, 한없이 쌓여진 책들 사이에 골똘히 독서에 몰입하고 있는 그의 모습. 이 순간의 직후에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내의 의심으로 비롯된 '당신들은 악마'라는 문자를 읽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치 그를 옥죄는 것은 현실(특히나 와이프)이라는 것처럼 쇼트는 두 번이나 같은 구조로 붙어있다.


이런 유사한 장면들의 병치보다 좀 더 광의적인 시각에서 <그 후>의 이야기 전체를 구조적으로 본다면 두 개의 시점의 스토리가 플래시백의 형태로 각각 독립적으로 작동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유기적으로 합쳐지며 하나의 강물로 만나는 구조이다. 영화의 어느 순간까지는 도무지 이 영화의 서사에 감을 잡을 수 없게 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실체는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특히 <그 후>는 그의 전작들 중에서 <북촌방향>과 유사한 지점들이 있는데, 우선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의 감을 잃게 만드는 흑백의 화면을 사용했다는 점이 그렇다(또 다른 측면은 후술 하겠다). 즉, 영화의 톤 자체부터 '실체가 묘연해 보이게' 축조되어 있다.


왜 <그 후>는 영화의 형식에서부터 실체의 모호함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자문하다 보니 문득 필자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과연 실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그 후(The Day After, 2017년 作)'



1. 너 왜 사니?

아름(김민희)이 봉완(권해효)에게 중국집에서 던지는 이 질문(왜 사세요?)으로 시작된 둘의 핑퐁. 탁상공론으로 볼 것인지 진지한 담론으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관객의 몫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아름과 봉완의 가치관은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실체가 있지만 가닿을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봉완을 위선자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녀는 실체가 있든 없든 자신의 삶 속에 '결여'라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은 살만하다고 생각하며, 나름 아름답다고까지 여긴다. 아니 그런 인정과 수용이 있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리라. 그녀의 이름부터 그냥 다 아름다워서 아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름의 속성이 더욱 명확해지는 순간은 그녀가 믿는 종교가 기독교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자신의 신앙심의 깊고 넓음의 정도에 상관없이 삶 동안 하나님의 실제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이해하니까 믿는 것이 아닌 이해하기 위해 믿는 맹목성을 보인다. 정말 이상한 점은 이성주의자의 눈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러한 행위들을 하는 순간 왠지 그들의 마음은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


실체의 유무라는 것은 꼭 이렇게 종교적, 철학적인 잣대를 들이대야만 고찰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충분히 사유할 수 있다는 뜻인데, 특히 인간관계에서 두드러진다. 최근에 아쉬가드 파라디의 <세일즈맨>을 본 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들의 인생은 가면극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여러 개의 가면 중 몇 개만을 보고 있는 것이고, 유대감이 깊을수록 상대의 가면을 몇 개 더 보게 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을 죽을 때까지 결코 완벽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한다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꽤나 경솔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 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간의 대화는 한쪽 측면의 얼굴만을 카메라에 담은 채 진행된다. 절대 카메라는 쇼트/역 쇼트에 정면의 얼굴을 담는 법이 없다. 심지어 이따금씩 아름은 고개를 관객 반대편으로 과도하게 돌리면서까지 대화한다. 영화의 시작 직후 봉완과 그의 아내의 대화에서부터 이미 그런 구도를 보이는 것이 끝까지 이어진다. 삼시 세끼 밥을 함께 먹고 술 한잔하며 마음속 이야기를 한다 한들 그들은 서로서로 상대의 딱 절반의 얼굴 정도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반만 정직한 인간관계들도 '실체 없음'이라는 속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 후>에서 실체를 뒤쫓는 사람은 봉완만이 아니다. 그가 실체에 접근하는 방법이 '사랑'이었다면 아내가 실체에 접근하는 방법은 '의심'이다. 분명히 외도를 하고 있다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는 '실체'를 좇는 그녀. 맞긴 맞는데 도통 잡는 방법을 모르겠으니 자신의 의심을 기반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괜한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기에 이른다. 사실 이 의심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언가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심을 하는 순간부터 실체 찾기는 시작되는 꼴이다. 실체가 있다고 믿고 좇으려는 그들은 안쓰럽기 짝이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실체 없음의 속성은 봉완의 사무실 창문에 비치는 SUV 차량의 모습 등으로 영화에 형상화된다.





2. 무력감을 깨달았을 때 오는 평안

인물들의 얼굴이 반절만 보이는 와중에 눈에 띄게 정면 얼굴이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이 있다. 지독한 실체 찾기 싸움에서 빠져나와  택시에 앉아 있는 아름의 모습. 시시콜콜한 안부를 던지는 택시기사(기주봉)는 아름의 입장에서는 실체 없는 존재라는 듯 끝내 역 쇼트는 보이지 않는다. 택시에 앉아 있는 아름은 한없이 평안해 보인다. 왜 일까? 내리는 눈은 아름답다. 하지만 땅에 닿으면 그 순간 녹아 실체가 사라진다. 아마 그녀는 택시의 창밖으로 그 눈을 보면서 '실체'라는 것에 가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비관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원인을 아는 것보다 이유를 모르는 일이 더 많다. 그래서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자신만의 믿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봉완과 와이프, 창숙(김새벽)은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묻고 또 묻는다. 보이지 않는 실체를 잡기 위해 허우적 거리니 삶이 안온하지 못하다. 반면에 아름은 이미 기독교 신자라는 것부터 드러난 사실이지만 삶에서 일정 부분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실체라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으며 좇으려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녀는 자신의 육신조차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녀는 평안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북촌방향>과의 또 다른 대구점을 언급하고 싶다. <북촌방향>은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일들은 어그러지고, 스치듯 생각만 했던 일들은 우연히 달성되기도 하는 나약한 인간의 무력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후>도 인간의 무력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같지만 받아들이는 태도가 조금 다르다. 전자가 처연함이라면 후자는 평안함이다. 무력감을 깨달았을 때 오는 평안함, 역설적으로 피어오르는 용기, 그것들에서 창발되는 아름다움. 아마 떨어지는 눈을 보며 아름이 느낀 것은 이런 것들 이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만난 봉완은 꽤 평안해 보인다. 알고 보니 실체 찾기를 그만두고 현실로 복귀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실체가 없음을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단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저런 생각에 대해 아예 머릿속에서 잊어버린 것 같다. 아름을 기억에서 지운 것처럼. 새로 온 직원의 목소리만 들릴 뿐 카메라에 비치지 않는 것을 보니 그의 실체 찾기 놀이는 이제 정말 그만둔 것일까? 그렇게 아름은 떠난다. 그런데 그 순간 봉완이 과거에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여념이 없었던 그 중국집의 배달부가 다가온다. 봉완은 다시 그 실체를 잡으려 고난의 길을 걷게 될까? '그 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 (별 4개)

무력감을 깨달았을 때 오는 평안




작가의 이전글 액션의 진일보, 영화의 퇴일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