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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l 30. 2017

액션의 진일보, 영화의 퇴일보

악녀 [쯔욘의 영화한잔]


김현수 평론가의 한줄평, '하드코어 숙희', 혹은 '올드 박쥐'. 필자는 특히 '하드코어 숙희'라는 문장에 무릎을 치게 된다. <악녀>에서 펼쳐지는 액션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라면 1인칭 시점의 액션일 것이다. '그것이 진정 신선한가?'라고 자문한다면 필자는 회의적이다. 가까운 과거를 반추해보면 작년(2016)에 개봉한 일리야 나이슐러 감독의 <하드코어 헨리>에서 매우 유사한 액션의 면모를 찾을 수 있기에.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 '감독이 꼭 각본까지 써야 하는가의 문제'. 아마도 이 혹평은 액션 감독으로서 보다 부족했던 작가 감독으로서의 면모 때문일 것이다.


어설픈 각본?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정병길 감독의 골머리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다. 어쨌든 최대한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으려 하고, '클리셰'를 배격하기 위함이 보인다는 뜻이다. <악녀>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고 동시에 칸에 다녀온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과 공통적인 구조적 특징을 갖는데, 바로 잦은 '플래시백'의 사용. 필자의 눈에는 두 영화가 시간여행을 이용하여 스토리를 축조한 것은 같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첫째는 서사에 리듬과 변주를 줌으로써 영화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함일 것이고, 둘째는 진실을 어느 정도 가려놓은 채 마치 양파껍질 벗기듯 한 겹 한 겹 미로를 풀어내는 방식의 구조 설정은 관객에게 몰입감과 흥미 유발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게 본다면 그간의 한국 영화의 고질병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영화의 첫 시퀀스부터 어느 조직의 아지트로 보이는 건물에서의 농밀한 액션이 펼쳐진다. 이때 숙희(김옥빈)의 등 뒤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그녀의 고독하고 외로운 걸음을 담은 카메라는 왠지 이제 그녀가 걷게 될 미래의 절망감, 참혹함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숙명을 그대로 예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부분만 따로 떼어놓아도 한편의 단편영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꽤 완성도 높은 장면이다. 이후 숙희가 정부 산하의 단체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올 때 선택한 직업이 '연극배우'라는 설정도 인생을 가면극으로 살아가는 악녀의 삶을 그대로 대유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디테일한 특징들이 있으니 필자는 <악녀>의 스토리를 무조건적으로 어설프고 진부하다고만 은 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결국에는 '감상주의'에 빠져들고 만다. 예를 들어 권숙(김서형)이 현수(성준)에게 건네는 '넌 나와 닮았어'와 같은 문제적 발언이 그것인데, 이 한 쇼트를 살짝 껴놓음으로써 적군과 아군의 경계에 있던 권숙을 숙희의 영역으로 단박에 끌어들이게 되고, 진심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명확하지 않았던 성준의 마음을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만들어준다. 이것은 숙희에게 관계 정리를 해주는 발언이기도 하지만 관객에게도 쉽게 많은 것들을 정리해주는 멘트이기도 하다. 참 간편하고도 경제적인 방법이지만 여러 가지 하찮은 이득을 전부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낡은 감성'뿐이다.

어떤 영화는 전체적으로 평이하지만 몇몇 흥미로운 지점들 때문에 영화의 가치가 상승하게 되기도 한다(예를 들어 <영웅본색> 시리즈). 반면에 어떤 영화는 몇몇의 모난 돌 때문에 그 영화 전체가 어설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악녀>가 바로 그렇다. 치졸하게 파고들어 비판을 한다면 숙희의 집에 잠입해 있던 춘모(이승주)가 결박당해있던 현수에게 한번 일기토를 벌이자고 기회를 주는 장면들도 결국은 국가 요원으로 등장하는 현수에게 '할 만큼 했다', '그의 액션도 춘모와 비등하지만 상황에 문제가 있어서 잡힌 것' 등의 부연 설명, 소박한 명예 회복 정도로 밖에는 안돼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몇 가지의 저울질 결과 <악녀>의 영화적인 면은 퇴일보했다는 입장이다.


'악녀(The Villainess, 2017년 作)'



도전적인 액션 장면의 시도로써는 미진함을 찾는 것이 힘들다. 그간 한국 영화에서 액션의 한 축이라면 류승완 감독일 것이다. 그의 액션이 육박감, 현실감, 고통감이라는 타격 자체의 통증을 고스란히 영화 밖으로 전달해주는 액션이었다면, 이제 또 다른 축이 되어가는 정병길 감독의 액션은 다양한 테크닉과 카메라 웍, 편집을 이용한 현장감, 비현실적임을 축조해 냄으로써 액션의 '판타지화'를 이루어 낸다. 관객은 <악녀>의 카메라를 따라가기가 벅차다. 동선과 합의 면면들만 봐도 영화라기보다는 잘 짜인 한편의 군무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특히 마지막 카체이싱을 포함한 버스 내부의 액션 시퀀스들은 감독의 전작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자동차 본 닛 위에 올라갔던 이두석(박시후)의 탈출 카체이싱의 업그레이드판 변주로 보이기도 한다. 시작의 시퀀스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시퀀스만 따로 발췌해 보아도 한편의 단편영화가 될 만큼 완성도가 정밀하다. 한국 영화로만 국한한다면 정병길 감독은 한국 액션 영화 성장의 발돋움이라는 인장은 분명히 찍어내었다. 그래서 필자는 <악녀>의 액션은 진일보했다는 입장이다.


중상(신하균)은 왜 숙희를 지옥도로 보냈는가? 숙희가 아버지의 복수를 실패하고 장천(정해균)에게 잡혀있을 때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온 중상과 장천은 한방씩 총격을 나눈다. 마주한 순간 둘의 미동으로 보건대 그들은 분명 일면식이 있는 자들로 보였다. 필자는 중상의 보호 속에 식물인간으로 살아있는 장천의 모습이 프레임에 담기는 순간 둘의 관계를 '부자관계'라고 추론하였다. 만약 부자관계가 아니라도 마지막 중상의 휘파람 소리로 판단컨대, 숙희의 아버지(박철민)를 살해한 그러니까 장천과 같이 있던 신원미상의 인물은 바로 중상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상과 장천은 설령 부자관계가 아니라 해도 꽤나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고 숙희의 아버지를 살해한 공범이다. 중상은 장천에게 총구를 겨누는 순간 자신과 숙희는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통감한 것이다.

중상(신하균)은 숙희를 사랑했을까? 중상도 숙희를 사랑했던 것 같다. 버스에서 숙희에게 내리치라고 말하며 그는 '자신을 죽이는 순간부터 진정한 고통이 시작된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망설이는 숙희 앞에서 그가 내뱉은 마지막 휘파람은 어쩌면 그가 숙희에게 전한 살인에 필요한 '단호함'이라는 마지막 선물이었으리라. 그렇게 숙희는 타의에 의해 '악녀'가 되어간다.

★★★ (별 3개)

액션의 진일보, 영화의 퇴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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