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란잔 Sep 01. 2017

반대가 끌리는 이유

록키 호러 픽처쇼


영화를 통해 세상의 텍스트들을 혹은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사유해 볼 수 있는 영화들이 있다. 주관적인 기준으로 좀 더 세분화하면 대중들에게 친절한 영화. 예를 들어 시드니 루멧의 <12인의 성난 사람들>. 반면에 감독의 머릿속 흐름 그 자체를 보여주어 난해하지만 깊이 보면 철학적 질문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영화. 예를 들어 폴 토마스 앤더슨 <마스터>. 영화의 쾌감 자체가 그러니까 유희 자체가 힘인 영화들도 있다. 그런 영화들은 오히려 세상의 텍스트를 들이대는 것이 영화를 오역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분노의 추격자>. 필자가 예로 든 영화들은 대표작들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의식의 흐름에 따라 떠오르는 데로 작성한 것이다. 이런 글을 한번 더 작성할 기회가 있다면 전혀 다른 영화를 예로 들 것이다. 각설하고 그렇다면 과연 <록키 호러 픽쳐쇼>는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안티테제. 변증법의 '반'. 주류가 아닌 비주류. 양지가 아닌 음지. 건전함이 아닌 음흉함. 이 영화의 좌표는 명확히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한 점은 필자가 열거한 단어들과 꽤나 어울린다는 점일 것이다. 무념과 무상의 상태로 킬킬거리면서 보게 되기도 하지만, 뭐 씹은 얼굴로 심각하게 보게 된다 한들 이해가 된다.


영화가 시작하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선'혈'빛 입술의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Science Fiction/Double Feature>. 공상과학, 동시상영, 심야극장. 그러니까 B 무비. 상업적으로 보면 A 무비에 밀려 상영되는 부차적인 영화이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틀린'영화가 아니라 '다른' 영화. 이 노래를 선전포고처럼 내뱉는다는 것은 자신의 태생적 한계와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포효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모더니즘이 도래하면서 생기는 부작용은 이분법적 사고, 흑백논리 등의 말들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세계 2차대전, 경제 대공황 등의 실질적 현세의 문제점들이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일 것이고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도 변증법적인 논리에서 해석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1960년대 시작하여 1970년대 중반 점검과 반성을 거치며 오늘날에 이르게 되는데 <록키 호러 픽처쇼>는 딱 그 지점 1975년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문제아 탄생의 기원과 정서적 성질이다.


'록키 호러 픽처쇼(The Rocky Horror Picture Show, 1975년 作)'



<록키 호러 픽쳐쇼>의 장르를 굳이 말하라면 뮤지컬, 코미디, 호러 등이겠지만 필자는 그중에서 공상과학영화에 속하기도 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SF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외계인과 우주선은 나오지 않는다. 가터벨트 같은 것을 하고(그것도 남자가) 성 정체성도 모호한 프랭크 앤 퍼터(팀 커리)가 외계인이고, 이 기괴한 저택 자체가 우주선이었다. 영화의 장르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 그간의 관습에 '반'하는 설정이다. 자넷 와이스(수잔 서랜든)와 브래드 메이저스(베리 보스트윅)는 성스러운 가톨릭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이 저택에 들어와 자신들의 내면의 은밀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굳이 속옷 색깔까지도 하얗다). 이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반'하는 점이다. 영화는 계속 무엇인가에 반대하는데 우리는 여기에 끌린다. 그게 참 오묘하다.


이 영화에 끌린다는 '우리'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첨언이 필요하다. 우선 '컬트 무비'라 함은 만 명이 한 번씩 보는 영화가 아니라 백 명이 백번 보는 영화를 말하는 것일 텐데, 당연히 <록키 호러 픽처쇼>는 컬트영화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 필자가 말한 우리는 9천9백 명을 제외한 나머지 백 명이다(참고로 필자는 백 명에 속한다). 최초 개봉 시에 받은 외면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서서히 극장가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결국 가늘고 길게 장기집권하며 어디선가 꾸준히 양산되는 백 명들에게 격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가진 분명한 매력이 있음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졸작과 걸작의 경계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독특하고 기묘하고 역하며 사랑스러운 마력.


왜 나는 반대가 끌리는 것일까? 나머지 9천9백 명을 설득을 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왜 사랑을 받는가에 대한 이유는 생각해볼 만한다.




인간의 내면은 정의롭고 도덕적으로 이상적인 가치관들을 보고 싶어 하고, 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감정이 있는가 하면, 내면의 다른 방문을 열어보면 야하고 잔인하고 더러운 것을 '굳이' 보고 싶어 하는 정서도 있다. 즉, 가학적인 장면들이 영화에서 나오면 눈을 돌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시퍼렇게 두 눈 똑바로 뜨고 즐기고 싶어 하는 본능이 교차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를 볼 때.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볼 때. 그러면 어떤 것이 실제 감정이냐? 필자의 생각에는 둘 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확대해석할 수는 없지만 인간은 본래 양가적인 감정이 공존한다. 아니 무수히 많은 갈래로 뻗히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어느 시대이건 어느 집단에 속해 있건 대부분은 도덕교육을 받고 자란다. 학교에서든 부모님에게서든 그 밖의 어디에서든. 그런데 이 도덕은 다소 이상적이고, 폐쇄적인 면이 존재한다. 자칫 잘못하면 보수주의적인 울타리 안에 가두는 형태의 교육이 되기도 한다는 뜻인데 이런 식으로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면서,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진행시키다 보면 반항심리가 생기는 종자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 종자들 중 활동력이 강한 소수는 '결여'에서 오는 대세에 반하는 상이한 취향을 찾기 시작하게 된다. <록키 호러 픽쳐쇼>에서 다루는 소위 키치 문화라고 일컫는 것들, 동성애를 넘어선 양성애라는 성 정체성의 모호 등 많은 것들이 언급한 반항심리에서 오는 결과물들이다. 학창시절만 생각해도 한 반의 학생 중 반항심리를 대놓고 표출하는 학생은 소수였듯이, 시대 속에서도 9천9백 명 중 백 명 정도였을 것이고 그들은 굳건히 자신들의 주관을 밀고 나간 결과 이 영화의 전설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필자는 이 두 가지 이유(인간의 태생적인 면, 결여에서 오는 반항심리)가 '반대가 끌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반대에 강하게 끌렸던 어떤 이들은 여전히 어디선가 격한 애정공세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자신에게 완전히 결여된 영역이기 때문에 끌리는 것일까? 필자가 언급한 첫 번째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내면에 반대적 요소라는 방이 있다는 이야기 이는 결국 우리를 끌리게 했던 반대라는 요소들조차도 사실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나르시시즘. 알고 보니 우리는 연못 물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에 사랑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인정하기 싫으니 혹은 솔직해지는 것이 용납이 안되니 어려운 용어들을 만들어서 변명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 (별 4개)

반대가 끌리는 이유





작가의 이전글 미성숙한 피터 파커, 미성숙한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