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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Sep 08. 2017

개안(開眼)하라

군함도


우선 현재 <군함도>에 대한 제설분분(諸說紛紛)한 시국에 관하여 필자의 개인적인 '설(說)'을 풀고 나서 이 영화에 대한 관을 정리하려 한다.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필자는 이 영화를 추호도 옹호할 생각이 없으며 반대로 근거 없는 막 비판을 할 생각 또한 없다. 다만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논지이다.


1. 애국심 마케팅?

일정 부분 그런 면이 있다. '욱일기'를 찢는 부감이 예고편에 떡하니 들어가 있으니 누가 봐도 관객을 뜨겁게 하려는구나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본편에 들어가면 그 장면의 힘은 약화된다. 긴 밧줄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상황적 맥락과 교묘히 조합되기 때문이다. 찢는 장면을 슬로로 잡는다든지, 죽어가는 엑스트라의 입을 통해 '대한 독립 만세' 등의 눈 뜨고 보기 힘든 강조는 없었고 이야기는 물 흘러가듯 흘러간다. 오히려 예고편에 이 장면이 없었다면 조금 더 자연스럽게 감흥을 유발할 수도 있었겠다. 그러면 이 영화의 전체가 우리의 가슴을 작위적으로 건들며 쉽게 분노하고 금방 마를 눈물바다를 일게 만드는 소위 말하는 '국뽕영화'인가? 필자는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비약이라고 본다.

약 300억의 제작비. 손익분기점 천만.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의 역사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제작자가 오롯이 경제적인 측면만을 고려하기 위한 가장 쉬운 선택은 '애국심'에의 호소일 것이다.(예를 들어 조금 다른 측면이지만 가장 명확히 성공을 거둔 예는 심형래 감독의 <디 워>). 말하자면 일본과의 악연의 고리가 꽤 길었던 우리나라의 경우, 그 역사에 대한 영화를 만들 때는 적든 많든 애국 키워드는 들어갈 수밖에 없다. 김한민 감독의 <명량>, 최동훈 감독의 <암살>, 김지운 감독의 <밀정> 등의 영화는 결말이 되면 굳이 배우들의 입을 통해 '후손들이 기억하겠지?' 등의 '격'을 떨어뜨리는 쇼트를 넣은 바 있고, <군함도>와 몇 주 간격으로 개봉한 비슷한 시대극 <박열>에서는 자막으로 고발을 대신했다.


필자가 보기엔 언급한 다른 한국 영화들에 비해서 정도가 심하지 않음에도 심지어 심형래 감독처럼 예능 프로에 나와 눈물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왜 이 영화는 국뽕영화라는 우레와 같은 비판을 받고 있을까? 아무래도 영화시장의 거대한 장악 때문이다. <서칭 포 슈가맨>을 보기 위해 영화가 상영하고 있는 영화관을 찾아다녔다는 류승완 감독 치고는, 영화계의 자본주의 논리를 타파할 수 있는 것은 관객 여러분들이라고 말했던 류승완 감독 치고는, 독과점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그와 언밸런스 한 조합이긴 한다. 그 점에 대하여 감독이 비판을 받는다면 - 물론 필자는 어떤 시장논리가 발생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다'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판이 영화 내적인 비판으로까지 불길이 번진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애국심 마케팅으로 영화 시장을 장악했으니 이 영화는 별로다.라는 식의 질 낮은 비판 말이다.


'보이는 것만 쓰십시오' 정성일 평론가의 말이다. 영화 자체를 비판하려면 영화에 보이는 것을 보고 비판을 하여야 한다. 영화 외적인 것을 끌어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마케팅을 떠나서 <군함도>가 역사를 통해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려는 기술에는 다소 이물감이 잡히는 면면들이 존재한다. 처음 한국 여인들이 더러운 성욕을 드러내는 일본군들의 옆에서 술 시중을 드는 시퀀스에서 굳이 '육회'를 집어 들며 캐릭터의 잔인성을 배가한다 든지, 오말년(이정현)의 플래시백에서 달아나려는 여성이 송곳에 어떻게 유명을 달리했는지를 굳이 보여주는 장면이라 든지. 꼭 필요한 장면들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런데 이것조차 오해일 수도 있는 것이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만큼의 잔혹한 비극을 영화로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들러 리스트>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한 후 마치 사냥감을 사냥하듯 유대인을 저격하는 아몬 괴트(랄프 파인즈)의 모습이 나온다. 그것을 보며 '굳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필자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어쩌면 이 못마땅함도 주관성(일제 강점기)과 객관성(홀로코스트)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기 때문에 더욱 엄격해지고 더욱 까다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애국심 마케팅'은 누명이라고 생각한다.


'군함도(The Battle Ship Island, 2017년 作)'



2. 역사적 비극은 거들 뿐?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의문과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또 다른 비판이 있다. 왜 하시마 섬의 비극 재현을 하지 않고, 그 속에 엉뚱한 감독 이야기만 담았나?이다. 영화는 결국에는 감독의 예술이다. 예술가가 하고 싶은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고 그 평가는 오롯이 본인이 책임지면 될 노릇이다. 즉, 어떠한 레퍼런스를 가져왔든지 간에 그 레퍼런스를 자기의 이야기로 꾸미는 것은 영화감독의 특권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의 비극의 역사를 레퍼런스로 가져왔기 때문에 꼭 그 실체를 재현하는 데에만 영화가 소모돼야 하는 것이 아니며, 유네스코에 촉구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류승완 감독 본인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의 슬픔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필자의 눈에는 선명한 아픔이 보였다.


<삼국지>를 조조 입장에서 기술하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다. 왜 <삼국지>를 '덕'있는 사람이 세상을 제패하는 이야기로 기술하지 않았냐?라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만들어진 데이빗 린 감독의 <콰이강의 다리>.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지만, 전쟁의 잔혹성, 일본인들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그 속에서 점점 주객이 전도 되어가는 인간들의 아이러니를 담은 영화이다. 왜 반전(反戰) 영화를 만들지 않았냐고 이 영화를 비판할 텐가? 다시 말해서 그 속에서 무엇을 담으려고 했든지 간에 잔인하게도 상관없다. 그 책임은 감독 본인이 지면 될 뿐이다.


3. 우매한 대중들아 개안(開眼) 하라!

이제는 영화에 대한 필자의 관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군함도>의 장르적 특징은 '첩보영화'로서의 전개이다. 박무영(송중기)을 필두로 한 윤학철(이경영) 탈출 작전. 그 와중에 발생하는 중상모략과 반전 그리고 아이러니. 물론 감독의 다른 첩보영화 <베를린>에 비해 액션은 상당히 저조하지만 역사적 비극 앞에서 자신의 테크닉을 앞세우는 것은 밸런스가 이상한 일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날 것 그대로의 최칠성(소지섭)과 송종구(김민재)의 목욕탕 액션은 거의 유일한 액션 신이지만 그 투박함은 이 영화의 온도와 잘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필자는 첩보물로서의 장르적 재미 그 이면의 이야기에 더욱 관심이 간다.


<군함도>는 분명히 계몽영화이다. 윤학철의 두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그 인장은 선명해진다. 윤학철과 사마자키 다이스케(김인우)의 손바닥 위에 놀아나는 시스템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우선 모든 일은 그것이 명성이든, 계급이든 간에 어쨌든 윗 대가리들의 머릿속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마자키는 원래 흑색의 악역이니까 군함도 노동자들도 그를 명확한 '악'으로 규정짓는 것은 간단하다. 문제는 윤학철이다. 이 사람은 흑과 백 사이의 회색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이타심과 이기심을 동시에 갖은 자. 그 둘을 철저히 컨트롤할 줄 아는 자.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 있는 윤학철과 같은 인물들은 개안을 해서 솎아 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윤학철의 구태가 드러나는 순간에도 국민들은 확신하지 못한다. 이것은 이강옥(황정민)의 말처럼 '하도 밟히고 억압받는 것이 몸에 배어 버려 알아서 기어 버리는'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고, 각자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시퀀스의 인물들과 직접적으로 매칭 시킬 수는 없지만 <군함도>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어느 시점까지는 하나같이 이기적이다. 이강옥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최칠성은 자신의 자존심만을, 박무영은 자신의 임무만을 위해 달리는 인물이었다. 윤학철 단죄의 순간에 모인 국민들도 사실상 이들과 그 궤를 같이한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 밥 빌어먹기 힘든 이들이 어찌 시스템의 폐단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고쳐나갈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류승완 감독의 해결책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즉, <군함도>는 악의 고리에 대한 개안을 하라는 일갈의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영화 속의 시스템은 비단 과거의 특수한 역사 속에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 시스템은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동작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 일갈의 과녁은 지금의 우리에게로 맞춰져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치적이기도 하다. 정성일 평론가는 '진짜 정치적인 영화는 <7번 방의 선물>, <광해> 같은 영화라고' 말했듯 정치를 소재로 하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대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 영화들. <군함도>는 분명히 언급한 영화들과 그 맥을 같이 한다(특히 군함도 노동자들이 촛불을 드는 장면은 그 의도가 명백하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치명적 문제점이 발생한다. 감독의 목적이 확실하니 가장 먼저 이용당하는 것은 배우들이다. 악사, 깡패, 비련의 여인, 군인. 딱히 국민의 표본이라고 말하기 힘든 직업군으로 구성된 캐릭터 선정은 영화의 스토리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인조성이 짙다. 즉, 그들은 영화 속에서 기능적으로 만 이용되며 완전히 플롯에 종속되어있다. 그래서 이상하리만큼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인상 깊었던 배우가 떠오르지 않고 선명한 계몽적 메시지만 머릿속에 떠다닐 뿐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괴물>, <마더> 이후 <설국열차>에서 숨 고르기를 했던 것처럼 <부당 거래>, <베테랑>이후의 <군함도>가 꼭 그렇다. 규모에 비해 도움닫기 측면의 필모그래피가 되어 간다고 해야 할까? 이것이 도약을 위한 숨 고르기 일지, 한계점을 드러낸 것일지 대한 증명은 류승완 감독의 다음 영화에서 할 수 있으리라.

감독은 눈을 뜨고 올바른 것을 분별하자고 말한다. 단생산사(團生散死)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조금 늦었다. 우리는 이미 얼마 전 영화보다 더 노골적이었던 현실의 사건으로 개안할 당위성을 찾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 (별 3개 반)

개안(開眼) 하라 우매한 대중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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